[김화진칼럼]정주영의 현대와 일본

머니투데이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2020.08.05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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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정주영의 현대와 일본


1960~70년대 개발 시대에는 많은 한국 기업이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거나 협력을 통해 성장했다. 그런데 아산 정주영이 창업한 현대도 일본 기업들을 열심히 공부는 했겠지만 특이하게도 일본과 이렇다 할 협력이 없었고 오히려 긴장관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아산은 1940년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했다. 고생 끝에 자리가 잡혀 꽤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일제가 기업정리령을 공포해 아도서비스는 1943년 초 일본인 소유 공장에 강제로 합병됐다. 그후 아산은 동생들의 징용을 막기 위해 황해도의 군수용 광산에서 광석 운송사업을 했다. 그러다 일인들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1945년 5월에 광산을 떠났다. 천우신조였다. 일본 패망 후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현대중공업은 1972년 영국과의 협력으로 출범했는데 아산은 그 훨씬 전인 1966년 당시 세계 1위 조선국 일본의 조선소들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때 산업 연관 효과가 크고 많은 외화를 벌 수 있는 조선업을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조선업에 진출하려고 하자 일본은 도움이 안 되었다. 제휴 파트너인 미쓰비시중공업은 새로 중국 진출 계획을 세우면서 협상을 멋대로 틀었고 통산성도 방해했다. 아산은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때 성사되었으면 독자기술도 없이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조선은 이제 현대중공업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일본이 현대에 다소나마 도움이 된 유일한 사례다. 현대차는 초기에 합작한 포드와의 제휴를 끝내고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1976년 1월에 탄생한 포니의 엔진개발에서 미쓰비시자동차와 기술제휴를 했다. 물론 미쓰비시 측은 보상만큼만 알려주고 그 이상은 엄중히 견제했다. 그게 다다. 현대차는 이제 혼다, 닛산을 넘어 토요타에 도전한다.
 
그 전인 1967년 소양강댐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아산과 현대는 일본과 본격적으로 부딪쳤다. 압록강 수풍댐을 지은 세계적 댐 건설기업 일본공영이 콘크리트 중력댐 설계를 가져왔는데 공사를 맡은 ‘일개 하청업체’ 현대건설이 사력댐으로 설계변경을 제안해 큰 소란이 일어났다. 아산은 철근과 시멘트를 수입해 써야 하는 콘크리트댐보다 주변의 자갈과 모래를 사용하는 사력댐이 공사비를 20~30% 절약할 수 있다고 주장해 일본은 물론이고 건설부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았다. 도쿄대 졸업생인 일본 측 책임자가 아산의 학력을 들먹여 소학교 출신으로서 수모도 당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포병장교 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사력댐이 전시에 더 안전하다고 보고 현대 측 안을 지지한 것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해 일본공영 회장이 아산에게 “이마가 땅에 붙게” 절을 하면서 무례를 사죄했다. 공사비는 실제로 20% 절약됐다. 사실 현대는 조용히 하청을 수행하고 돈을 벌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공사는 대일청구권 자금이 일부 투입되는 프로젝트였다. 아산이 나선 이유는 일본공영이 그 돈을 최대한 일본으로 환수하려 했다고 봐서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이유로 일본은 지난해 7월 우리나라에 보복성 수출규제를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시작되어 계속된다. 그런데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 1년간 한국 경제의 대일 수입 의존도가 낮아져 수출규제의 타격이 크지 않은 반면 일본의 국가신용도는 하락했다. 일본은 국제분업에서 좋은 파트너일 수도 있지만 현대의 역사가 보여준 것처럼 꼭 아쉬운 존재일 필요는 없는 나라다. 그렇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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