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곪게하는, 그들만의 '운명 공동체'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20.07.2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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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부짖지 못할 수밖에-②]견제·균형 깨진채 '집단' 형성…타 부서와 격리, 친밀한 관계 맺기도 어려워

편집자주 박원순 성추행 사건 피해자가 이런 편지를 썼다. "처음 그 때 저는 소리 질렀어야 하고 울부짖었어야 하고 신고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게 너무 후회된다고 했다. 긴 침묵의 시간 동안 힘들고 아팠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침묵하게 하는 '구조' 문제였다. 그 안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전하고 싶다. 울부짖지 못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은 용기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피해자 곪게하는, 그들만의 '운명 공동체'




퀴즈: 안희정과 박원순의 공통 키워드 세 가지는?

정답은 '지자체장'과 '비서', 그리고 '성폭력 사건'이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수행비서 김지은씨를 네 차례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지난해 9월 징역 3년6개월형이 확정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했고, 그는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고, 이후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대체 왜 비슷한 사건이 되풀이됐으며, 피해가 쉬이 드러나지 않고 곪았을까. 전문가들은 선출직인 지자체장과 비서실, 그 '특수성'을 이해해야 해법을 마련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박 시장 사건에 대해 "시장실 연관 조직이, 일반 공무원 조직과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조직 규율이 적용되기 어려운 것 같단 설명이었다.

박원순과 함께 사라진, 27명의 사람들
고한석 서울시 비서실장 10일 오전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고인의 유언장을 공개하고 있다./사진=뉴스1고한석 서울시 비서실장 10일 오전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고인의 유언장을 공개하고 있다./사진=뉴스1


7월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으로 생(生)을 마감했을 때, '그의 사람들'이라 불린 27명의 별정직 공무원들도 함께 사라졌다. 비서실장, 정무수석, 보좌관 등 박 시장이 직접 발탁한 이들이다. 임명권자의 임기가 끝났으니, 더는 머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선출직 시장이자 거물 정치인이던 그와 '생사를 함께한' 셈이다. 박 시장뿐 아니라, 다른 지자체에서도 기관장과 보좌진 사이 비슷한 관계가 형성돼 있다. 지자체장을 보좌했던 정계 관계자는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그의 말을 따르고 때론 방향을 제시하는, 함께 살고 죽는 관계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기존 공무원 조직과는 다른, 일종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그 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다. 박 시장 사건에서도 여실히 적용됐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에 따르면, 비서이자 피해자인 A씨가 내부에 피해를 호소했음에도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란 반응이 나왔다. 한 비서관에게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피해자 측에 따르면, 이 같은 피해 호소 및 부서 이동 요청을 스무 차례나 했단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A씨가 고소장을 제출한 뒤엔 "여성 단체에 휩쓸리지 말라"며 회유 및 압박을 했단 주장도 나왔다.


성희롱 문제가 불거져 박 시장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함께 살고 죽는 이들이라, 이 같은 문제를 드러내지 못하고 감쌌을 거란 비판이 제기됐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매뉴얼이 아무리 잘 돼 있어도, 제대로 운영이 안 된 건 '집단'이 형성돼 있어 그렇다"고 했다. 그는 "같은 선상에서 10~20년씩 활동한 사람이 모여 있으니 얼마나 '운명 공동체'이고, 내 편만 있겠느냐"며 "그러니 '체크 앤드 발란스(서로 견제해 균형을 맞추는 것)'가 깨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 그들만의 '공간'
피해자 곪게하는, 그들만의 '운명 공동체'
그렇다면 문제가 비서실 외부에서라도 보고 발견이 돼야 하는데, 폐쇄적인 환경 탓에 그마저도 어려웠다.

지자체장 집무실과 비서실이, 그 특성상 다른 조직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박 시장이 머물렀던 6층 집무실과 비서실도 마찬가지였다. 집무실 앞엔 직원이 늘 상주해 있고, 용건이 있는 경우에만 들어갈 수 있게 돼 있었다.



과거 수년간 서울시를 출입했던 기자 B씨는 "기자 출입증으론 서울시 모든 부서에 들어갈 수 있는데, 시장 집무실만큼은 용건이 명확해야만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가는 일이 드물었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출입 기자 C씨도 "시장 인터뷰나 기자단 면담 때나 들어가 봤던 것 같다"며 "1년에 한두 번 정도여서, 비서실 직원들도 그때 겨우 봤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부서가 아닌 다른 직원들과 쉬이 관계를 맺기도 어렵다. 안 전 지사 수행비서 김지은씨 미투를 지지한 공공기관 비서 출신 D씨는 김씨 재판에 보낸 탄원서에서 "업무상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 상당해, 동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가 비교적 어렵다"며 "심리적, 육체적 어려움과 낯선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어려움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 은밀함 속에서, 집무실은 공통적인 '성희롱 피해 장소'가 됐다. 박 시장 비서도, 오거돈 전 부산시장 피해자 C씨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수행비서 김지은씨도, 기관장 집무실에서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드러나지 않는 피해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승 연구위원은 "처음에 머리카락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고, 그러다 다른 행동으로 발달되는 게 성폭행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며 "병이 곪게 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분석했다.

기관장-비서, 강력한 '종속' 관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9일 형 집행 정지 기한에 맞춰 광주교도소로 들어가고 있다./사진=뉴스1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9일 형 집행 정지 기한에 맞춰 광주교도소로 들어가고 있다./사진=뉴스1
상사를 충실히 보좌해야 하는 비서 업무의 '특수성'도, 구조적으로 짚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상사의 심기를 늘 살피고, 지시를 거스를 수 없으며, 충성심을 보여야 하기에 강력한 '종속'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모든 걸 맞춰야 하고, 거절하는 건 꿈꿀 수도 없다는 게 공공기관뿐 아니라 기업서 근무하는 비서들의 증언이었다.

공공기관서 비서 업무를 하는 E씨는 "비서는 모두가 '아니오'라고 할 때에도, '맞다'고 따라야 하는 사람이며, 처음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배운 게 그런 거였다"고 했다. 그래서 박 시장 성폭력 사건을 보며 "피해자가 그 거대한 위력 앞에서 얼마나 작아졌을지, 고통스러웠을지 너무 잘 알아서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일 잘하는 비서에 대해선 "상사 그 자체라 할 만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이라고 했다. 거기에 E씨 본인은 아예 배제된다고 했다.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는 저서 '김지은입니다'에서 업무 매뉴얼을 공개했다. 그 중심 단어들을 보면, '선택의 최소화', '안테나', '악역', '개인관리', '외장하드', '보호' 등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시키기 쉬운 부하 되기', '철저히 리더만을 위한 판단', '항상 리더편', '험담 시 적극 방어', '영광은 리더, 칭찬은 동료, 책임은 내가' 등이 있었다. 거기에 '아프지 않기'와 '겸손, 인내, 희생' 등이 덕목으로 들어가 있었다.
피해자 곪게하는, 그들만의 '운명 공동체'
박점규 직장갑질 119 운영위원은 "비서와 관련해 사적 소유물처럼 여기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인식 부분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사생활 영역과 공적 영역을 철저히 분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비서를 두고 있다고 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건 아니라서, 비서 문제로만 치환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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