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성추행 의혹, 신고했어도 박원순에게 '보고'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20.07.25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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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부짖지 못할 수밖에-①]기관장 못 막는 서울시 '성희롱 매뉴얼'…고충위원회 위원도 '서울시장'이 위촉

편집자주 박원순 성추행 사건 피해자가 이런 편지를 썼다. "처음 그 때 저는 소리 질렀어야 하고 울부짖었어야 하고 신고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게 너무 후회된다고 했다. 긴 침묵의 시간 동안 힘들고 아팠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침묵하게 하는 '구조' 문제였다. 그 안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전하고 싶다. 울부짖지 못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은 용기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박원순 성추행 의혹, 신고했어도 박원순에게 '보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서가, 그가 입었다는 성추행 피해를 서울시에 신고했다고 치자(실제로는 그러지 못했고, 비서실 내에서만 피해를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끝내 경찰에 고발했다).

서울시가 잘 만든 '성희롱 예방 시스템'은 이렇다.



1단계(신고 전) : 부서장과 고충 상담

2단계(신고) : 성희롱 고충 상담원(여성권익담당관), 인권담당관(시민인권보호관), 고충상담창구 이메일, 신고 게시판



3단계(30일 이내 조사) : 인권담당관(시민인권보호관)

4단계 : 성희롱 고충사건 결정 및 이행 결과 시장에게 보고

5단계 : 인사위원회 개최 및 행정처분, 가해자 의무교육 및 피해자 회복조치


신고창구도 다양하게 마련해놓았고, 피해자 상담을 어떻게 할지도 세부 지침을 뒀다. 조사하는 동안엔 피해자, 가해자를 분리토록 했다. 그에 따라 징계할 수 있게 했으며, 이를 잘 이행하는지, 피해자를 어떻게 회복할지도 매뉴얼이 있다. 그래서 다른 지자체에 비해 선진적인 제도라 평가받았었다.

신고받는 사람이, 서울시장이 임명하는 사람
박원순 성추행 의혹, 신고했어도 박원순에게 '보고'


근데 그게 '서울시장'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서울시장의 인사권은 어디까지일까. 서울시 한 고위 관계자는 "통상 실국장, 과장까지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1~4급 고위직은, 사실상 서울시장이 임명하는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시스템을 들여다보자. 성희롱 고충 상담원이 속한 여성권익담당관(과장급), 그리고 일반 임기제 공무원인 시민인권보호관이 인권담당관(과장급)에 속해 있다.



성희롱 신고에 대한 두 책임 부서의 장을, 서울시장이 임명한다. 다만 시민인권보호관은 독립적인 업무를 하도록 돼 있다. 서울시 인권담당관 관계자는 "보고, 지시 모두 독립적으로 한다"고 했다.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 A씨도 "외부 압력 없이, 독립적으로 잘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게 불안했을 피해자 입장에선, 그 독립성이 제대로 확보되는지, 어디까지 지켜지는지 그마저 의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시장 사건 보고가, 서울시장에게 가는 '역설'
박원순 성추행 의혹, 신고했어도 박원순에게 '보고'


시민인권보호관이 조사한 뒤엔,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가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한다. 이 위원회는 시민인권보호관 3명과, 외부전문가 6명으로 구성돼 있다. 그 외부전문가 6명을, 서울시 인권보호팀에서 선정한다. 그러니 별수 없이, 서울시와 완전히 동떨어지기 힘든 구조다.

결정문이 통지되면, 여성권익담당관에서 가해자 의무교육을 한다. 과장급 공무원이, 자신의 인사권자인 서울시장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결정사항이 제대로 이행되었는지는 '성희롱, 성폭력 고충심의위원회'에서 맡는다. 위원장은 행정1부시장과 외부전문가가 함께 맡는데, 행정1부시장은 서울시장이 임명한다. 내부위원은 여성가족정책실장 등 공무원들인데, 그 역시 서울시장이 인사권자다. 거기에 외부위원까지 서울시장이 위촉한다. 사실상 서울시장 영향이 안 닿는 이들이 없는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희롱 고충 사건의 결정과 이행결과는 서울시장에게 보고토록 돼 있다. 본인의 사건 결정 및 이행 여부를, 스스로 다시 받아보는 역설에 빠지는 셈이다.

성희롱 문제를 '기관' 스스로에 맡기는 한계
박원순 성추행 의혹, 신고했어도 박원순에게 '보고'
서울시장이 성희롱했을 때를 대비한 '매뉴얼'이 부재했던 셈이다. 서울시 산하기관의 경우에만, '기관장 또는 임원급이 성희롱했을 땐 서울시로 이첩해 처리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서울시장 성희롱 사건이 불거졌을 땐, 이를 대신해줄 곳이 없었다.



그러니 피해자인 박 시장의 비서는, 매뉴얼에 따라 신고하지 못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인사이동을 요청하는 것뿐이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6년 1월부터 반기마다 인사이동을 요청했지만, 3년 반이 지난 지난해 7월이 되어서야 옮길 수 있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시장을 정점으로 한 업무 체계는, 침묵을 유지하게 만드는 위력적인 구조였다"고 했다.

결국 기관 내 성희롱을 기관 내에서 해결하려는 한계점이 드러난 셈이다. 전문성이 부족하고, 가해자와 관련된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란 것. 그 대상이 기관장 또는 고위직일 경우 더 그렇다. 안지희 성폭력 전담 변호사는 "본인이 시장이나 고위직에 대해 조사한다고 하면, 담당자들이 그만두고 싶다고 느낄 것"이라고 했다.

이론적으론 기관 스스로 성희롱 사건을 다루고, 해결하며 학습하고,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조직문화로 가는 게 좋지만, 한계가 있단 의미다. 서울시가 이런 상황이면, 다른 지자체는 더 역부족일터. 안 변호사는 "지방으로 내려가면, 지역 변호사 중 성희롱 사건의 전문성이 있는 이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제3의 감시기구' 필요성
박원순 성추행 의혹, 신고했어도 박원순에게 '보고'
그래서 서울시장 같은 권력자가 성희롱을 저질렀을 때, 피해가 커지기 전 막을 수 있는, '제3의 감시기구'가 필요하단 전문가 의견이 나왔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중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1차 안전핀'으론 기관 내부에서 기관장 등에 문제를 지적해줄 수 있는 전담 부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되 객관적인 공채 방식으로 선발하고, 기관장을 향해 원칙대로 처리해도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는, 권력에서 독립돼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일종의 '감시 체계'다.

그게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을 땐, '2차 안전핀'으로 외부 감시기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승 연구위원은 "국민권익위원회나 국가인권보호위원회 등에서, 최고층의 잘못된 문제에 대해 처리할 수 있도록 '전담 부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피해자를 위한 방어막, 은신처를 다 만든 상태에서, 검찰 고소 등이 일사불란하게 이뤄져 2차 가해를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 제도 안에서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피해가 있으면, 피해가 있다고 쉽게 얘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시 체계가 작동을 안 할 때에 대비해 국가인권위원회 등을 만들었는데, 지자체를 감시하는 부서가 따로 있지 않다"며 "앞으론 그런 종류의 부서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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