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우보세]

머니투데이 김지산 기자 2020.07.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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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로 인해 전대미문의 위기를 마주 하고 있지만 은행들은 1분기에 그런대로 괜찮은 실적을 거뒀다. 신한·KB·하나·우리금융지주 등 4대 금융지주회사의 순이익은 2조8371억원으로 1년 전보다 1.4% 감소하는 데 그쳤다. 증권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실적이었다.



비결은 대손충당금이었다. 이들 지주회사의 대손충당금 적립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1% 늘어난 정도에 그쳤다. 충당금은 고스란히 순이익을 깎아 먹는 요인이다. 이런 행보는 해외의 대형 은행들과 차이가 있다. JP모간이나 HSBC 등은 같은 시기 각각 미국과 유럽에서 전년 동기보다 평균 350%, 269% 가량 충당금을 더 쌓았다.

물론 이를 두고 국내 금융회사들이 안이했다고 몰아세울 일은 아니다. 어려운 시기에 ‘융통성’ 있게 가자는 금융당국과의 공감대가 작용했다. ‘융통성’은 서민대출을 염두에 둔 것이다. 만약 은행, 금융지주들이 서구 은행들이 그랬듯 충당금을 크게 쌓았다면 자본이 줄어 BIS(국제결제은행) 비율이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은행은 재무건전성의 마지막 보루인 BIS 비율을 지키기 위해 대출에 극도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 피해는 당연히 신용이 낮은 서민들부터 입게 된다.



이 상황은 은행뿐 아니라 정부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3월 이후 정부는 2차례에 걸쳐 소상공인 같은 서민 유동성 위기에 대비해 선제적인 초저금리 대출을 시행했다. 은행들이 보수적으로 회계처리를 했다면 시도조차 못했을 일이다.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금융당국의 스탠스는 정반대가 됐다. 2분기 실적에 코로나19 관련 대손충당금을 충분히 반영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대기업에서부터 시작해 서민까지 일정 수준에서 금융지원이 이뤄져 급한 불은 껐다는 안도감과 이대로 은행을 내버려 뒀다간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동시에 작용했을 것이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당국의 방침도 달라진 셈이다. 만약 1분기부터 충당금을 더 쌓으라고 은행들을 압박했다면 은행들의 대출태도나 시중의 유동성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당국이 은행에 건전성을 강화하라는 메시지를 준 것은 일견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장 충담금을 더 쌓게 되면 BIS 비율 때문에 은행의 대출태도는 변화할 것이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0년 3분기 중 국내은행의 대출태도지수는 대기업, 중소기업, 가계를 막론하고 모두 하락했다. 국내 은행의 신용위험지수는 45로 전분기보다 3포인트 높아져 사상 최고치였다. 2008년 4분기 44 이후 최고치다. 은행들은 이미 유동성 잔치를 닫을 준비를 하고 있다. 연체관리도 타이트하게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두고 한 시중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이제부터 ‘개와 늑대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황혼 즈음 붉게 물든 언덕 위에 뭔가가 서성인다. 가족 같은 우리 집 개인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달려드는 늑대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때가 오는 것이다. 그는 “위기의 시대에는 모두가 개가 될 수도, 늑대가 될 수도 있다”며 “동시에 모두가 개 또는 늑대를 마주하며 운명의 순간을 기다리는 처지이기도 하다”고 했다.

충당금 때문에 실적이 나빠진 은행은 차주에 빡빡해질 수밖에 없다. 쫓기는 이가 남의 사정을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비단 은행과 은행에 빚진 기업, 개인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은행 입장에서 보면 당국이 지평선에 서 있는 ‘그 무엇’일 수 있다.

대법원에서 종결된 파생금융상품 키코 사건을 두고 피해기업들에 보상하라고 한다든가 라임자산운용 사기 사건의 원인 제공자를 그냥 두고 은행에 100% 환불해 주라는 등의 일련의 조치 때문이다. 라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그대로 손실로 잡힌다. 대출 여력이 그만큼 준다.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힘겨울 수 밖에 없는 시점에 모든 경제 주체들은 예측 가능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돌발행동으로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했다가는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다. 비 올 때 우산을 뺏지 말라는 얘기는 금융당국도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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