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의 의무’만 가득한 계약서…종이 한장에 노예된 선수들

머니투데이 김남이 기자, 정경훈 기자 2020.07.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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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겨례하나 경주지회 등 지역 16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경북 경주시청 앞에서 전 경주시청 소속 트라이애슬론 직장운동부  고 최숙현 선수의 사망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밝혀줄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시민단체 회원들은 기자회견에서 "최 선수 사건은 경주시청의 철저한 묵인 하에 진행됐다며 진정을 묵살한 관계자를 포함, 폭행과 폭언 등 인권침해 관계자들에 대해 강력히 조치하고 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사진=뉴스17일 오전 겨례하나 경주지회 등 지역 16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경북 경주시청 앞에서 전 경주시청 소속 트라이애슬론 직장운동부 고 최숙현 선수의 사망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밝혀줄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시민단체 회원들은 기자회견에서 "최 선수 사건은 경주시청의 철저한 묵인 하에 진행됐다며 진정을 묵살한 관계자를 포함, 폭행과 폭언 등 인권침해 관계자들에 대해 강력히 조치하고 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사진=뉴스1


"헛웃음이 납니다. 이런 계약서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고(故) 최숙현 선수가 몸 담았던 경주시청 직장운동부(실업팀)의 선수계약서를 본 변호사는 기막혀했다. 선수들이 맺은 계약서는 ‘노예 계약’과 다름이 없었다. ‘을’인 선수의 의무만 수없이 나열돼 있고, ‘갑’인 경주시체육회의 권리는 사실상 무한했다.



문제는 불공정거래 경주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실업팀 계약서에는 독소조항이 있었다. ‘복종의 의무’라는 규정을 둔 실업팀까지 있었다.

'갑'이 필요할 때 언제든 선수 방출 가능...각종 행사도 참석해야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규정 임용 계약서 중 /출처=경주시체육회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규정 임용 계약서 중 /출처=경주시체육회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설치 및 운영관리 내규에 따르면 선수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임용(연봉)계약서 △입단지원서 △서약서 등을 작성해야 한다. 최 선수는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트라이애슬론팀과 2017년, 2019년(2018년 컨디션 저조로 제외) 계약을 맺었다.



경주시청에서 직장운동경기부 운영을 위탁받은 경주체육회는 올 4월 관련 내규를 개정했다. 하지만 최 선수가 맺은 계약서와 서약서 등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경주시체육회장인 ‘갑’인 임용 계약서는 곳곳이 독소조항이었다. 계약의 해지 부분엔 ‘기타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 성적 부진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해도 선수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와 함께 규정과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갑’이 정하는 바에 따라야한다. 계약서의 해석도 ‘갑’에 따라야 한다. 말 그대로 ‘갑’의 명령이 절대적인 셈이다. 서약서에는 ‘계약자가 각종 행사 참석 요청 시 참여한다’라는 규정까지 있다.


사단법인 두루의 최초록 변호사는 “계약해지 부분에서 ‘갑이 필요하다’고 하는 부분은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은데, 그 해석을 ‘갑’이 할 수 있도록 했다”며 “아무 때나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복종의 의무'까지 사실상 노예 계약...공정위 '표준계약서' 검토
통영시 직장운동경기부 운영 규정 /출처=통영시통영시 직장운동경기부 운영 규정 /출처=통영시
문제는 이런 불공정계약이 경주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취재진이 행정안전부의 자치법규정보시스템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각 지자체 실업팀 계약에서 ‘독소조항’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 문제가 불거지가 공정거래위원회는 표준계약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트라이애슬론팀을 운영하는 통영시의 경우 운영 규정에 ‘복종의 의무’가 있다. 선수단원은 ‘소속 상사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또 정당한 사유 없이 지시 및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고용은 언제든 중지될 수 있고, 선수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서울시는 우수선수로 영입된 선수가 계약기간 중 타팀으로 이적하면 지급된 영입(육성)비의 2배를 물어야 한다. 또 이적의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경기단체 및 산하기관의 규정이 아닌 계약을 우선시 해야한다.

실업팀 간의 이적을 막는 조항은 실업 연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실업육상연맹의 경우 올해부터 최초 실업팀 인단 선수의 계약 기간을 7년으로 못 박았다. 계약기간이 만료된 선수도 이적을 위해서는 팀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결국 국민인권위원회는 해당 조항을 바꾸라고 권고까지 했다.

이외에도 여러 자지단체에서 계약서의 해석을 ‘갑’에 따라야 한다는 조항이 발견됐다. 최 변호사는 "계약서에 없는 것을 ‘갑’이 정한대로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계약서에 없는 내용은 갑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따라야 맞다"고 강조했다.

이어 "운동선수가 생계유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런 계약서를 받아들었을 때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운동선수도 운동 생활의 특성을 반영한 표준 계약서를 만들고 이를 선수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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