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SK 배터리 전쟁發' 디스커버리, 국내 특허분쟁 판도바꾼다

머니투데이 세종=김훈남 기자 2020.07.0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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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SK 배터리 전쟁發' 디스커버리, 국내 특허분쟁 판도바꾼다


정부가 불공정무역 사건 조사에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검토한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재판절차 전 분쟁 당사자가 갖고 있는 증거를 공개하는 일종의 증거조사 방식이다. 영업비밀을 방패 삼아 증거제출을 거부하는 일이 잦은 특허분쟁에 주로 쓰인다.

5일 관련 부처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무역위원회 증거조사제도 고도화 방안연구' 용역을 발주하고, 무역분쟁 증거조사에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가능방안 검토에 착수했다.



미국과 독일 일본 등 해외 주요국 증거조사 제도 운영현황과 장단점을 분석하고 국내 기업 관계자와 전문가 의견을 모으기 위한 용역이다.

우리나라 불공정무역행위 조사절차에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가능성과 타당성 검토 및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위한 세부설계 등도 과제로 포함시켰다. 산업부는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여부와 방식을 판단할 전망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지난해 LG와 SK의 특허분쟁은 디스커버리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미국 ITC(국제무역위원회)에서 진행됐다"며 "디스커버리 제도 국내 도입에 대한 타당성과 관련 업계 및 전문가 의견을 검토하기 위함"이라고 연구용역 배경을 설명했다.

美서 치른 LG화학-SK이노 배터리 전쟁, 국내 디스커버리 도입 불당겨
최근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2차전지 영업비밀유출 분쟁 과정에서 국내에도 디스커버리 제도가 소개됐다. LG화학은 지난해 4월 "인력을 통한 2차 전지 기술을 유출했다"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SK이노베이션을 제소했다. 국내 업체 사이 특허분쟁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진행한 이유는 국내에 없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통상 특허관련 자료는 소송에 들어가더라고 영업비밀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일반 소송 절차로는 상대방의 영업비밀 침해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 수집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문제점이 지적돼왔다.


LG화학이 미국에 사건을 제기한 것도 본안 심리를 시작하기 전 양측의 배터리 특허 관련 서류를 공개해 쟁점을 명확히 하고 신속한 결론을 내리기 위함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미국 ITC는 올해 2월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로 예비판결, 10개월여만에 사건 방향을 잡았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스마트폰 특허분쟁이 국내에서 3년여만에 무승부로 끝난 것과 대조적이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의 이의제기에 따른 재검토가 진행 중으로 이르면 올해 안에 특허침해 여부에 대한 ITC 판단이 이뤄질 전망이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분쟁 이후 정부부처 안팎에선 국내 특허분쟁 절차를 효율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내에서 진행할 수 있는 소송을 미국에서 진행할 경우 그에 따른 비용 소모, 해외 대리인과 사건 관계자에 의한 해외 기술유출 가능성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산업부 관계자는 "LG와 SK 사이 영업비밀 침해조사와 관련해 국내 첨단기술 유출 우려가 나왔다"며 "산업부뿐만 아니라 특허청과 공정거래위원회, 법원도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도 도입 시 빨라지는 특허분쟁…특허공룡 공세는 어떻게 막을까
지난해 9월 서울지방경찰청은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이노베이션 본사등 2곳을 압수수색했다. 이날 압수수색은 LG화학이 전기차용 배터리 영업비밀 유출을 이유로 SK이노베이션을 고발한데 따른 절차다. 이날 SK서린사옥에서 직원들이 드나들고 있다.  /사진=뉴스1<br>
지난해 9월 서울지방경찰청은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이노베이션 본사등 2곳을 압수수색했다. 이날 압수수색은 LG화학이 전기차용 배터리 영업비밀 유출을 이유로 SK이노베이션을 고발한데 따른 절차다. 이날 SK서린사옥에서 직원들이 드나들고 있다. /사진=뉴스1
법조계 등 현장에선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시 특허분쟁 처리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행 민사소송 규정으로는 특허침해로 소송을 당한 당사자에 대해 증거제출을 강제할 수단이 사실상 없다. 이 때문에 형사 고소를 병행하기도 하지만 당사자의 비협조 시 소송 장기화는 물론, 특허침해를 입증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대한특허변호사회 회장인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현장에선 증거를 제출하라고 해도 안내는 당사자가 다수"라며 "증거확보가 어려워 특허침해 입증과 배상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구 변호사는 "특허침해 개연성이 있을 때 비공개를 전제로라도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며 "소송진행의 규칙인 만큼 공정하게 발령요건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이 우리 기업의 압박수단이 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같은 이례적 상황을 제외하면, 주요 특허분쟁은 글로벌 대기업과 우리 기업 사이에서 대부분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외 사법당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방어하는 논리로 해외와 다른 국내 사법 체계를 내세웠는데, 동일한 디스커버리 제도를 시행하면 글로벌 특허 공룡의 압박수단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디스커버리 제도를 통해 상대 기업의 특허정보를 유출하는 악용 소지도 있는 만큼 제도 설계의 공정성과 안전판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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