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를 다시 타고, 서울을 누볐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20.07.0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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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찾아 1시간 헤매고, 점심은 '들어갈 수 있는 가게'로…8년 전 처음 탄 휠체어, 세상은 여전히 불편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서점에 갔다. 서가 팻말엔 '달라질듯 달라지지 않는 세상'이라 적혀 있었다. 8년 전에 휠체어를 처음 탔었고, 여전히 불편한 게 많았다. 그래서 이 말에 공감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셀카휠체어를 타고 서점에 갔다. 서가 팻말엔 '달라질듯 달라지지 않는 세상'이라 적혀 있었다. 8년 전에 휠체어를 처음 탔었고, 여전히 불편한 게 많았다. 그래서 이 말에 공감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셀카


'휠체어'를 다시 타고, 서울을 누볐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마트에 장 보러 가는 길이었다. 소변이 급했다.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운 좋게도, 건물 1층에 '장애인 화장실'이 보였다. 부리나케 휠체어를 움직였다. 출입구엔 자동문 스위치가 있었다. 파란색 열림 버튼을 눌렀다. "사용 중입니다"라는 담백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화장실 내부는 컴컴한데, 사용 중이란 게 이상했다. 그래도 기다렸다. 방광은 이미 출렁이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기에. 하지만 10분이 지나도록 '사용 중'이란 빨간 불빛은 바뀌지 않았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난 1시간이 넘게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부질없었다. 장애인 화장실이 그곳 말곤 아예 없었다. 휠체어를 끄는 것도 힘든데, 왔다 갔다 하려니 고역이었다. 등에 땀이 흥건해졌다. 다시 1층으로 돌아와, 아까 그 장애인 화장실로 향했다. 계속 '사용 중'이라 나왔다. 건물 보안요원 번호를 찾아 전화해 이 문제를 얘기했다. 그는 내게 "열림 버튼과 닫힘 버튼을 동시에, 오래 꾹 누르고 있으면 열린다"고 안내했다. 겨우 비밀을 알게 된 뒤 실소가 터졌다. 이게 무슨 '보물 동굴'이라도 되나 싶어서.

계속 '사용중'이라 표시돼 있던 합정역 인근 장애인 화장실. 하도 답답해서 보안요원에게 전화했더니, 열림과 닫힘 버튼을 동시에 꾹 누르고 있으면 열린다고 했다. 이게 무슨 보물창고인가./사진=남형도 기자계속 '사용중'이라 표시돼 있던 합정역 인근 장애인 화장실. 하도 답답해서 보안요원에게 전화했더니, 열림과 닫힘 버튼을 동시에 꾹 누르고 있으면 열린다고 했다. 이게 무슨 보물창고인가./사진=남형도 기자
7초 정도 꾹 누르고 있으니 화장실 문이 마침내 열렸다. 당연한 것도 이리 힘들구나 싶어 먹먹해졌다. 그 뒤론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것도 꾹 참았다.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휠체어를 8년 만에 다시 탔다. 처음 탄 건 2012년 2월이었다. 수습 기자 때였다. 몹시 추운 날, 수동휠체어를 탔다. 늘 다니던 세상이 몹시 불편해졌다. 그걸 세세히 기록해 전했다. 많은 이들이 그리 불편한 줄 몰랐다고, 공감해줬었다. 그리고 세월이 꽤 흘렀다. 그간 나도 까먹고 지냈던 것 같다.

2012년 2월, 난 처음 수동휠체어를 탔었다. 눈으로 볼 땐 별 것 아닌 저 경사로도, 휠체어를 타니 올라갈 수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사진=남형도 기자2012년 2월, 난 처음 수동휠체어를 탔었다. 눈으로 볼 땐 별 것 아닌 저 경사로도, 휠체어를 타니 올라갈 수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사진=남형도 기자
2020년 여름이 됐다. 문득 주위를 돌아봤다. 여전히 휠체어 위 세상은 많이 불편할 것 같았다. 한 번 탔었기에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타기로 맘먹었다. 실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휠체어에 또 오르진 않았으면 했었다. 없었으면 좋았을 체험이라 생각하며, 동 주민센터에서 수동휠체어를 무료로 빌렸다. 전동휠체어를 타는 이들이 많이 늘었지만(2017년 기준 10만2000여명, 통계청), 혹여나 사정상 그걸 못 타는 이들까지 헤아리기 위해서. 그러니 감안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400미터 가는데 30분, 익숙한 길과 죽어라 싸웠다
동네 주민센터에서 휠체어를 무상으로 빌려줬다./사진=남형도 기자동네 주민센터에서 휠체어를 무상으로 빌려줬다./사진=남형도 기자
비 소식이 있다기에 우비를 입고 휠체어를 탔다. 눈높이가 낮아졌다. 양손에 힘을 줘서 휠체어를 움직였다. 바퀴를 굴리는 것과 방향을 트는 것, 오랜만임에도 다행히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낯익었던 길은 금세 불편해졌다. 걸을 땐 몰랐다, 인도가 그리 굴곡져 있는지. 경사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길이라, 휠체어가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애써 왼쪽으로 꺾어서 조금 갈라치면, 다시 오른쪽으로 굴러갔다. 하필 오르막길이었고, 좁은 길에 누군가 내놓은 쓰레기며 이런저런 장애물도 많았다.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좋지 않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늘 다니던 동네 길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해졌다. 경사에, 오돌도돌한 도로 재질에, 이리저리 휘청거렸다./사진=남형도 기자늘 다니던 동네 길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해졌다. 경사에, 오돌도돌한 도로 재질에, 이리저리 휘청거렸다./사진=남형도 기자
보도는 울퉁불퉁해 굴러가는 것도 고난이었다. 한시도 요동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에 따라 내 몸도 휘청거렸다. 계속 들썩이니 먹은 게 없음에도 울렁거렸다. 힘들어 중간중간 쉬다가, 다시 힘을 내어 움직였다. 침묵하는 도로와 전투하는 기분이었다. 약 500m(미터) 정도 움직이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동네 안까지 진입한 뒤 '전동휠체어'를 검색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가격이 정말 비싼 건 수천만원대, 비싼 건 600~800만원대, 그러나 저렴한 것도 100~200만원에 달했다. 대여하려 찾아보니 하루에 3만5000원, 한 달에 30만원이 넘었다. 기본적인 이동도 돈이 많이 드는구나, 이 또한 빈부격차가 있겠구나 싶어 씁쓸해졌다.

휠체어를 탄 지 1시간 만에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수동휠체어를 홀로 타는 환경은 여전히 안 된다는 걸. 수동휠체어를 타려면 밀어줄 누군가 필요했고, 그렇지 않으면 전동휠체어를 사거나 빌려야 했다. 환경의 척박함을 돈으로 메워야 했다.

버스는 여전히 '조마조마'
휠체어를 타고, 버스에 오르니 손잡이를 놓을 수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휠체어를 타고, 버스에 오르니 손잡이를 놓을 수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연남동에 가서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해보기로.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었음 싶으니까.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향했다. 8년 전과 달라진 건 있었다. 체감상 저상버스(휠체어가 탈 수 있는 버스)가 늘어난 기분이었다. 검색해보니, 서울은 지난해 기준 저상버스 도입률이 47%라 했다. 2012년(24%)보다 비율이 두 배 정도 늘었다. 그러나 그건 그나마 서울이라서. 부산은 22%, 인천은 19%, 대전은 24%이고, 천안은 무려 6.85%란다. 상상할 수 있는가. 버스 100대가 오면 97대는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기분을.

파란 버스를 타기로 했다. 8분 정도 기다리니 타려는 버스가 왔다. 휠체어로 이동하는데, 그 와중에 그냥 떠나버렸다. 한 대를 허망하게 놓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6~7분 정도 더 기다리니 한 대가 더 왔고, 재빨리 움직여 "기사님, 버스 탈게요"하고 외쳤다. 잠시 후 뒷문에서 철로 된 발판이 자동으로 펼쳐졌다. 길게 뻗더니, 인도에 철컹하고 내려앉았다.

버스 안에 들어가려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경사가 높았다. 뒤로 넘어갈 것처럼 기우뚱했다. 애써 힘을 써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고 버티고 있으니, 좌석에 앉아 있던 한 여성 승객이 다가와 앞으로 밀어줬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홀로 타긴 무리였다. 장애인 좌석에 앉아 있던 승객이 일어났고, 의자를 접으니 비로소 공간이 생겼다. 거기에 휠체어를 세웠다.

버스에서 음악 듣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이어폰을 꺼내려는 찰나에 버스가 출발했다. 휠체어가 순식간에 뒤로 쏠렸다. 자체 브레이크를 넣었지만 소용없었다.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휠체어가 춤을 췄다. 불안한 맘에 오른손은 손잡이를, 왼손은 휠체어 핸들을 잡았다. 그러니 겨우 휠체어가 진정됐지만, 마음은 계속 조마조마했다. 두 손은 꼼짝없이 그리 묶여 있었다.

양화대교를 건너며 한강 바람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게 이마에 살포시 닿아 시원해졌고, 그제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단 걸 알았다. 버스는 타기도 힘들고, 타서도 힘든 거였다.

위험한 차도로 나갈 수밖에
홍대입구역 인근 횡단보도.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진입턱 경사가 급한 곳이 많았다. 오고 갈 때 꽤 애를 먹었다./사진=남형도 기자홍대입구역 인근 횡단보도.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진입턱 경사가 급한 곳이 많았다. 오고 갈 때 꽤 애를 먹었다./사진=남형도 기자
홍대입구역에서 내렸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서 움직이기란 더 힘든 거였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초록 불이 켜진 시간 내에 무사히 건넜다.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인도에 들어서려는데, 보기와 달리 경사가 너무 급했다. 허울 좋게 만들어놓았다. 낑낑대며 들어서려다, 또 휠체어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대각선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씩, 힘겹게, 겨우 올라왔다. 차가 쌩하고 지나가는 소리에 목덜미가 움츠러들었다.

인도의 난관은 더 깊어졌다. 젊은 행인들의 빠른 걸음에, 광고 간판에, 그 밖의 장애물에 여러모로 치였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도로 경사는 동네보다 훨씬 심했다. 안간힘을 쓰느라 손바닥이 얼얼했다. 홍대입구역 버스정류장에서 연트럴파크 입구까지, 불과 450m 거리를 오는데 무려 30분이 걸렸다. 공원에 들어서기도 전에 기진맥진했다.

새로 도로를 만드는 이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다. 한쪽으로 경사가 치우치지 않게 해달라고. 그 덕분에, 휠체어로 다닐 때 중간에 몇 번을 쉬었는지 모르겠다고. 부디 평평하게 해달라고./사진=숨이 턱턱 막히는 남형도 기자새로 도로를 만드는 이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다. 한쪽으로 경사가 치우치지 않게 해달라고. 그 덕분에, 휠체어로 다닐 때 중간에 몇 번을 쉬었는지 모르겠다고. 부디 평평하게 해달라고./사진=숨이 턱턱 막히는 남형도 기자
그 뒤로는 그냥 차도로 내려왔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멈춰서야 했고,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갈 땐 무섭기도 했다. 위험하단 걸 알았지만, 그게 불편한 인도보단 차라리 나았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오르막길을 오르다 택시에 치여 숨졌다는, 어느 67세 어머니의 기사를 봤던 게 생각났다. 그 역시 차도가 두려웠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나왔을 것이다. 그게 공감돼, 가슴에 사이다를 부은듯 저려왔다.

점심은 '먹을 수 있는 가게'에서
자주 가던 연남동 요거트 가게 입구는 높다란 나무 턱이 놓여있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었다./사진=허망한 남형도 기자자주 가던 연남동 요거트 가게 입구는 높다란 나무 턱이 놓여있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었다./사진=허망한 남형도 기자
연남동 끄트머리에 있는 요거트 가게서 점심을 먹을 참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비를 채우고, 연트럴파크를 따라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곳 역시 경사가 오른쪽으로 쏠려 있었다. 나아갈 때마다 휠체어가 오른쪽으로 갔고, 방향을 다시 잡았고, 어깨와 팔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보단 이동하는 게 그나마 익숙해졌다. 휠체어 의자에 기대지 않고 무게중심을 앞으로 한 뒤, 바퀴를 세차게 굴리니 속도가 조금 났다.

자주 쉼이 필요했다,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에도. 눈높이가 낮아지니 자세히 보이는 것들이 있어, 다소 위로가 됐다. 빗방울이 물에 닿아 퍼지는 동그란 결들과, '노루오줌'이란 재밌는 이름의 식물과, 우연히 만난 동네 고양이 두 마리의 다정한 움직임 같은. 그런 풍경들을 보며 거칠어진 숨을 달랬다.

35분이나 걸려 가게 앞에 도착했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구엔 커다란 나무 턱이 놓여 있었다. 문이 열려 있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처음 알았다. 그 가게 단골로 1년 동안 다니면서도 전혀 몰랐다. 내겐 "어서 오라"며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너무 무관심했다.

그 가게만 원망할 일이 아녔다. 다른 가게 몇 군데를 다녀보니, 거의 다 그랬다. 입구에 턱이 있거나, 계단을 올라가야 하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먹고 싶은 곳이 아니라,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단 것을. 그렇게 50분을 헤맨 끝에 마침내 들어갈 수 있는 국밥집을 찾았으나, 생각보다 진입로 경사가 급해 돌아서야 했다.

꽤 오래 헤맨 끝에 겨우 들어온 가게.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가게를 찾는 게 참 어려웠다. 점심을 먹는 것조차 감개무량./사진=남형도 기자꽤 오래 헤맨 끝에 겨우 들어온 가게.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가게를 찾는 게 참 어려웠다. 점심을 먹는 것조차 감개무량./사진=남형도 기자
오후 1시 40분이 돼서야 돼지불백 가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도 못 들어갈 뻔했으나, 한 대학생이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줬다. 따끈한 콩나물 된장국을 한술 뜨니,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정신없이 허기를 달랜 뒤 창밖을 보며 멍을 때렸다. 하도 힘을 주고 다닌 탓에, 두 손이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나가기 싫다', '힘들다', '두렵다', 그렇게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내 책에 손이 닿지 않았다
서가 맨 꼭대기에 놓인 내 책을, 도저히 집을 수 없었다. 책을 꽂을 땐 아마 생각을 못했을 것 같다. 누군가는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을./사진=남형도 기자서가 맨 꼭대기에 놓인 내 책을, 도저히 집을 수 없었다. 책을 꽂을 땐 아마 생각을 못했을 것 같다. 누군가는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을./사진=남형도 기자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힘듦에 절은 몸을 깨웠다. 키오스크에서 주문했다. 그게 차라리 편했다.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똑같이 대했으니까. 그곳에 휠체어를 위한 자린 없었고, 난 높다란 의자 뒤쪽에 휠체어를 세워놓고 바깥 구경을 했다. 테이블은 어깨높이까지 왔다. 매장 안에선 원두를 가는 소리와, 고객을 찾는 점원 외침과, 가수 백예린의 노래 스퀘어가 뒤섞여 분주한 오후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서점과 마트에 갔다. 거기엔 차마 손에 닿지도 않는 것들이 많았다.

홍대입구역 인근 대형서점에 가서 내 책을 검색했다(요즘 취미). 서가 위치를 파악한 뒤 그곳에 갔다. 고개를 젖혀 살펴보니, 국내수필 서가 맨 위에 책이 놓여 있었다. 손을 뻗어봤다. 닿지 않았다. 그 칸에 있는 책은 모두 집을 수 없었다. 겪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녔다. 서가 사이 공간이 비좁아서, 휠체어가 아예 들어가기도 힘든 곳이 많았다.

합정역 인근 대형마트는 들어가는 길부터 험난했다. 카트는 안 미끄러지는, 기다란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가, 휠체어가 뒤로 미끄러지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순간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위기를 모면했다. 휠체어는 카트만큼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일지.

좋아하는 젤리에도 손이 닿질 않았다. 휠체어 위에서는. 사진은 발이 아니고 오른손이다./사진=남형도 기자좋아하는 젤리에도 손이 닿질 않았다. 휠체어 위에서는. 사진은 발이 아니고 오른손이다./사진=남형도 기자
그리고는 서점과 상황이 비슷했다. 헬스할 때 쓰는 장갑이 필요해 판매대로 갔다. 손이 안 닿는 곳에 걸려 있었다. 그러니 같은 높이에 있는 손목보호대, 팔목보호대, 팔꿈치보호대 모두 '그림의 떡'이었다. 결국 돌아섰다. 비빔면을 사러 갔다. 원하는 걸 사려니, 손에 닿을랑 말랑, 간당간당했다. 손가락 끝으로 겨우 비닐을 잡아 어렵사리 꺼냈다. 젤리도 사러 갔다. 원하는 맛은 역시 집을 수 없었다.

사고 싶은 게 아니라, 살 수 있는 걸 고민해야 했다. 그만큼 휠체어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안 돼 있었다.

30초 거리를, 20분씩 돌아가야 했다
마트 출입구가 코앞인데, 들어갈 수가 없다. 가까운 출입구는 왜 다 불편한 길인지./사진=남형도 기자마트 출입구가 코앞인데, 들어갈 수가 없다. 가까운 출입구는 왜 다 불편한 길인지./사진=남형도 기자
동선에 대한 배려도 너무 없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다.

마트에 들어갈 때였다. 안내판을 따라 지하 1층에 갔더니, 에스컬레이터 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맸고, 지하 2층까지 갔고, 차들이 오가는 주차장을 통해 겨우 출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철을 타러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합정역 방향이라고 해서 따라갔더니, 계단밖에 없었다. 코앞이 지하철역인데 눈물을 머금고 뒤를 돌아야 했다. 엘리베이터를 찾아 돌아가느라 20분은 족히 걸렸다.

편하고 가까운 길은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가 많았고, 휠체어가 갈 수 있는 길은 꽤 많이 돌아가야 했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거라 치면, 최소한 '휠체어 길'을 위한 안내 지도는 별도로 있었으면 싶었다. 안내판이 전부 비장애인을 위한 것으로 제작돼 있어서, 그걸 따라갔다가 낭패를 많이 겪었다. 가뜩이나 휠체어로 다니기 힘든 길인데, 어림짐작으로 어딘지 찾아 여기저기 헤매느라 진을 너무 많이 뺐다. 고작 이동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손톱만한 '희망'을 보았다면
휠체어를 위한 지하철 안전 발판을 놓고 있는 사회복무요원./사진=남형도 기자휠체어를 위한 지하철 안전 발판을 놓고 있는 사회복무요원./사진=남형도 기자
그 하루가 울적했던 이유는, 8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렇게 변화가 더디었나 싶어서였다. 어떻게든 잘 알리겠다고 밤잠을 설쳐가며 기사를 썼었고, 독자들은 그에 공감했었고, 변화의 씨앗을 뿌렸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불편도, 힘듦도 여전했다. 해 질 무렵엔, 온몸이 녹초가 된 데다 감정까지 깊이 가라앉아, 휠체어를 움직일 의지조차 별로 없었다.

작은 희망이나마 필요했고, 어떻게든 낚으려 분주히 다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행히 보았다. 그럼에도 달라진 게 있다는 것을. 그게 아녔다면 글을 쓸 힘조차 없었을지 모르겠다.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예전엔 휠체어를 움직이다가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 홈에 바퀴가 푹 빠졌었다. 이대로 문이 닫힐까 싶어 꽤 놀랐었고, 승객들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왔다. 그 일은 적잖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다시 홍대입구역 승강장에 휠체어로 왔을 때, 또 빠지면 어쩌나 싶어 고민이 컸다.

그러나 승강장 안전문에 이런 안내 문구가 있었다. 휠체어용 이동식 안전발판이 준비돼 있으니, 역무실로 연락을 달라고. 그 번호로 전화하니, 사회복무요원 두 명이 안전발판을 가지고 나왔다. 출입문이 열리니 그는 그걸 깔아주었고, 도착역인 합정역에서도 이용할 수 있도록 전화해 준비를 시켜줬다. 덕분에 지하철을 무사히 탈 수 있었다.

신형 시내버스엔, 휠체어를 꽉 붙들어줄 수 있는 고리와 안전벨트가 설치돼 있었다. 그래도 무언가 나아지고 있다고./사진=남형도 기자신형 시내버스엔, 휠체어를 꽉 붙들어줄 수 있는 고리와 안전벨트가 설치돼 있었다. 그래도 무언가 나아지고 있다고./사진=남형도 기자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조금 놀랐다. 마침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신형 버스를 탔다. 휠체어 좌석은 아예 의자도 없이 널찍했고, 두 바퀴엔 고리를, 복부엔 안전벨트를 맬 수 있게 돼 있었다. 버스 기사가 하나씩 친절하게 고정해준 뒤, 어느 정류장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그 덕분에 버스가 이리저리 가도, 휠체어는 거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맘이 편해지니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서 여유 있게 아내에게 문자도 보내고, 양화대교를 건너며 좋아하는 음악도 들었다.

죽음으로 외쳐야 겨우 닿는, 더디기만 한 변화
휠체어 리프트 사망 사고 후 시위에 나선 장애인들. 그리 많은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다니고 싶다고 외치는 것일뿐./사진=뉴스1휠체어 리프트 사망 사고 후 시위에 나선 장애인들. 그리 많은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다니고 싶다고 외치는 것일뿐./사진=뉴스1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서점과 마트를 가고. 그게 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낸 일상의 전부였다. 그 평범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길 위에 버려야 했다. 우연히 휠체어에 타게 됐단 이유 하나만으로. 그만큼 모든 부분에서, 여전히 배려가 안 돼 있었다.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녔다. 그냥 평평한 길이 필요했다. 경사져 있지 않고, 재질이 거칠지 않으며, 인도에 장애물이 많지 않은, 맘 편히 다닐 수 있는 길 말이다. 단언컨대, 그날 다닌 길 중 가장 편했던 길은 마트 내부였다. 바닥이 어찌나 매끄럽고 평평하던지, 모처럼 활기차게 움직였다. 그건 아마도 휠체어를 생각하고 닦은 게 아니라, 카트를 잘 끌도록 고객을 배려해 생길 수 있었으리라. 그리 짐작하니 속이 쓰렸다.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들은 참 오래도록 외쳤다. 이동권을 보장해달라고. 어렵게 말해 이동권이지 별 게 아니다. 그저 편히 다닐 수 있게 해달란 거다. 그게 너무 안 된다.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 좀 설치해달라고 그리 외쳤었다. 참 시간을 오래 끌었다. 2017년 10월, 신길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쓰던 고 한덕경씨가 사망했다. 그러고도 2년이 지난 지난해 9월이 돼서야 광화문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장장 23년 만이었다.

어딘가를 가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달란 건데, 이들이 죽음으로 외치는 정도가 된 뒤에야, 겨우 목소리가 닿는가 싶다.



가는 곳마다 '시선'이 쏠렸다는 건
시내버스를 타려면, 또 승객들 시선이 쏠리겠지. 그건 장애인이 그만큼 주위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휠체어를 타보니 금세 알게 됐다./사진=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남기자시내버스를 타려면, 또 승객들 시선이 쏠리겠지. 그건 장애인이 그만큼 주위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휠체어를 타보니 금세 알게 됐다./사진=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남기자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서울에서 휠체어를 탔지만, 수도권이 아닌 지역은 더 열악하다. 그걸 취재하려 휠체어로 시외버스를 타려 했더니 갈 수 있는 지역이 고작 4개란다(부산, 전주, 당진, 강릉). 그것도 지난해 10월부터 겨우 시행됐다. 심지어 표를 끊으려 하니 당일엔 못 간단다. 3일 전에 미리 끊어야 탈 수 있단다. 그리 선택지가 제한돼 있다. 당일 시외버스 여행은 꿈도 못 꿨다.

저상버스는 가장 잘 돼 있는 서울도 도입률이 절반도 안 된다. 2012년 뉴스를 보니, 2016년까지 55%로 늘리겠다고 했었다. 거짓이 됐다. 이번엔 2025년까지 100%로 높이겠단 약속을 내놓았다. 이제 5년 남았다.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 일이다.

이준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는 "일상에서 이동하는 전반에 걸쳐, 문제를 겪고 있다"고 했다. 장애인 콜택시도 마찬가지다. 대중교통이 엄두가 안 나는 이들이 주로 이용하지만, 대기시간이 들쭉날쭉하단다. 이 활동가는 "1시간을 예측해 불렀는데 10분 만에 와서 가 버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2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고 했다.
시외버스를 휠체어로 탈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1년이 채 안 됐다. 그러나 갈 수 있는 지역은 네 곳 뿐이다./사진=뉴시스시외버스를 휠체어로 탈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1년이 채 안 됐다. 그러나 갈 수 있는 지역은 네 곳 뿐이다./사진=뉴시스
전동휠체어 비용은 국민건강보험공단 급여로 209만원까지 지원된다. 기초생활수급자만 100%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자비 10%를 부담해야 한다. 6년에 한 번씩 지원된다. 기능이 좋은 건 턱없이 비싸다. 예컨대, 의자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도 있다. 이게 왜 필요한지, 만원 버스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사람들 엉덩이 쪽에 얼굴이 닿는 경우까지 있으니. 그러니 이들에게 좋은 휠체어는 사치가 아니라, 필수품이다. 섬세히 지원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체험하며 가는 곳마다 참 많은 시선을 받아냈다.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휠체어로 다니는 장애인이, 그만큼 주위에 드물다는 거다. 늘 보는 이들이라면, 그리 빤히 쳐다보지 않았을 것 같다. 걸어 다니는 비장애인들을 한 명씩 다 바라보진 않으니까.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왜 그들이 우리 주위에 보이지 않는지를.

솔직히 말해야겠다. 내겐 체험이어서, 일정 시간 버티면 일어날 수 있어서, 그런 희망 덕분에 겨우 마칠 수 있었다고. 그게 아녔다면 절망해서 무너졌거나, 그냥 집 밖을 안 나오는 쪽을 택했을 것 같다고. 그 정도로 휠체어에서 겪은 세상은 너무 불편했다고 말이다.
'휠체어'를 다시 타고, 서울을 누볐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에필로그(epilogue).

비 오는 날, 동네까지 휠체어를 밀어준 고마운 청년에게.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뒤 걱정이 많았습니다. 집까지 가는 언덕은 꽤 경사가 가파르거든요. 어쩌겠나 싶었습니다. 이미 하루의 기운은 다 빠졌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휠체어를 움직일 수밖에요.

하필 비가 부슬부슬 또 떨어지더라고요. 휠체어 핸들은 미끌미끌해지고요. 그런데 움직임이 갑작스레 편해졌습니다. 돌아보니 그대가 뒤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위까지만 밀어 드릴게요." 혹시나 부담스러울까 싶어 이유를 또 붙이더군요. "비까지 오고 그러니까요."

동네 앞에 왔는데, 계속 밀고 있더라고요. 괜찮다고 했더니,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습니다. 당신은 동네 은행 직원이라 했고, 나중에 실적이라도 올려주고 싶어 이름을 물었지만 알려주지 않았지요. 젤리라도 주려 했더니 한사코 거부하더군요.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습니다. 근데 그건 그만큼 미안했단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당신은 나와 함께 비를 맞았고, 반듯한 셔츠가 젖었고, 그렇지만 휠체어 손잡이를 잡느라 우산도 못 썼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웃는 그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는 이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도했습니다. 휠체어 위에서 정말 많이 안절부절못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당신에게 기댔던 건, 그 길이 너무 힘들다는 걸 알아서였어요. 이미 전 하루종일 휠체어를 탔었고, 꽤 지쳐 있어서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집에 와 기절해 뻗어 있던 시간이, 적어도 한 시간쯤은 줄었으리라 믿고요.

언젠가 더 좋은 세상이 오길 바라봅니다. 그러면 휠체어를 다시 타고, 그대와 어느 여름에 나란히 산책하며 얘길 나누고 싶습니다. 일렬로 말고, 옆으로 말이지요. 이것 보라고, 세상이 이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느냐고 얘기하면서요.

그래요, 사실 그날의 저는, 홀로 당당히 동네까지 올라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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