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풀 걸 법으로?"…역사왜곡금지법에 사학자도 갸우뚱

머니투데이 정경훈 기자 2020.06.30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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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항일독립운동을 다룬 영화 '밀정' /사진=뉴시스1920년대 항일독립운동을 다룬 영화 '밀정' /사진=뉴시스


"독립운동가 김립은 1922년 임시정부 지도부 지시로 경무국 요원에게 암살당합니다. 연구 결과, 김립이 소련 정부가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빼돌렸다는 누명을 썼기 때문이었죠. 이를 보고 누군가가 김립이 억울하게 죽었다며 김구 등 당시 지도부를 비판했을 때 반대측이 역사왜곡금지법이 정한 '독립유공자 명예훼손죄'로 신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국 현대사 석사 수료 A씨

역사학자들이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역사왜곡금지법'에 관해 학술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일부 처벌조항이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30일 정치권에 따르면 양 의원이 이달 1일 대표 발의한 이 법은 미디어·집회 등에서 식민지배를 찬양하거나, 독립유공자, 광주민주화운동·세월호 참사를 폄훼 혹은 왜곡하는 경우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독립유공자 등에 대한 명예훼손시 별도 고소가 없어도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법이 학술적 목적 연구를 처벌 예외로 뒀지만 현실적으로 고소나 수사가 일어나 연구와 표출의 자유, 역사 인물·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저해될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는 지적이다.



"취지는 공감…그러나 말로 풀 문제 법으로 풀어"
학자들은 법의 취지에는 공감하나 문제의 소지가 크다고 봤다.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한국근대사)는 "일제 전쟁범죄 찬양은 물론 '5.18' '4.16'을 모욕하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으로 허용할 수 없는 발언이고 극우 발언을 규제하는 유럽처럼 법으로 금지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에 관한 명예훼손 처벌은 자유로운 연구를 막을 수 있어 '조건부 찬성'에 그친다"며 "몇몇 사례처럼 현재 독립유공자인 인물의 친일행각이 뒤늦게 드러날 수도 있는데, 학자나 시민이 어디선가 재평가를 제기했을 때 논란과 함께 고소 대상이 될 수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김헌주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는 "제재하고자 하는 망언은 일부 극우 논객, 사이트를 중심으로 나온다"며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식민지배나 국가폭력이 부당하다는 정서적 공감대가 우위에 있어 이를 미화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게 현실"이라고 했다.


역사왜곡금지법안을 발의하는 양향자 의원 /사진=뉴스1역사왜곡금지법안을 발의하는 양향자 의원 /사진=뉴스1
그는 "이 법이 오히려 쇼비니스트(맹목적 애국주의자) 논객들이 허위 사실을 동원해 기존 사학계를 '친일 단체'로 비난하는 현상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며 "학자나 시민의 토론으로 풀어야 할 역사관 논쟁을 정치가 이용하거나 수사기관이나 법관이 재단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역사왜곡'이란 전 국민이 동일하게 받아들여야 할 '정사(正史)'가 있고 이것을 왜곡했다는 뜻인데, 자의적인 설정"이라며 "분명히 존재한 일제의 수탈과는 별개로 경제사학자들의 통계 연구가 과거에는 불경시된 '식민시기 경제성장'에 관한 새 사실과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수탈과 저항'이라는 기존 관점에 딱 맞지는 않지만 식민지를 근대성의 차원, 즉 도시, 문화, 젠더, 생태환경 등의 관점들로 파악한 연구 성과가 '금지법'으로 빛이 바랠 수 있다"며 "처벌 예외 조항이 있더라도 역사 해석에 형법을 들이대면 상상력의 자유가 억압될 것이 너무나 자명하다"고 강조했다.

이신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장 역시 "금지법 제6조는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행위 자체를 처벌한다"며 "의도와 취지는 이해 가지만 일반 법과 달리 '찬양·고무죄'를 둬 악법이라는 평을 듣는 국가보안법과 겹쳐보인다"고 했다.

"이 법은 '옥상옥'…입법해도 범위·대상 명확히 해야"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왼쪽부터 △1월 유관순 △2월 김마리아 △3월 손병희 △4월 안창호 △5월 김규식·김순애 △6월 한용운 △7월 이동휘 △8월 김구 △9월 지청천 △10월 안중근 △11월 박은식 △12월 윤봉길 등이다 /사진=뉴시스3.1운동 100주년인 2019년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왼쪽부터 △1월 유관순 △2월 김마리아 △3월 손병희 △4월 안창호 △5월 김규식·김순애 △6월 한용운 △7월 이동휘 △8월 김구 △9월 지청천 △10월 안중근 △11월 박은식 △12월 윤봉길 등이다 /사진=뉴시스
현재 있는 법으로도 문제가 되는 발언들은 제재할 수 있어 역사왜곡금지법은 실질적으로 필요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이 소장은 "지금 형법으로도 문제 발언 제재가 가능해 새 입법은 '옥상옥'"이라며 "관련 법이 있는 독일에서도 역사부정이 심하게 일어나는 현실이고 이는 법으로 풀 문제가 아닌 토론으로 논파하거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임 교수도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법"이라며 "그런 만큼 '독립운동가 명예훼손 처벌'처럼 포괄적인 방법 아닌 길더라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등처럼 법의 대상과 목적, 명칭, 내용을 좁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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