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룡 “박치에도 뮤지컬에 출연…이 나이에 뭘 못하리”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20.07.01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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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7년만에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출연하는 임하룡…다재다능 비결 "우물 여러 개 파야"

박자를 못 맞춰 뮤지컬 만큼은 쉽지 않은 출연이었다고 말하는 배우 임하룡. 그는 17년 만에 선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여배우를 스폰하는 단순 무식한 감초 캐릭터로 나와 관객에게 큰 웃음을 안겨준다. /사진=이기범 기자<br>
박자를 못 맞춰 뮤지컬 만큼은 쉽지 않은 출연이었다고 말하는 배우 임하룡. 그는 17년 만에 선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여배우를 스폰하는 단순 무식한 감초 캐릭터로 나와 관객에게 큰 웃음을 안겨준다. /사진=이기범 기자


무대 스타 도로시 브록의 스폰서인 애브너 딜런(임하룡)은 공연 제작 비용의 상당 부분을 대면서 사사건건 참견한다. 여주인공의 스타일부터 공연 콘셉트까지 개입하면서 연출자 줄리안 마쉬로부터 눈총을 받자, “아, 이거 쑥스럽구만” 하며 한발 물러선다.



30여 년 전 히트한 그의 유행어가 이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재연된 순간이었다. 객석 곳곳에서 “까르르”하며 배꼽 잡는 중장년들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지난 23일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열린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오는 8월 23일까지)의 한 장면이다. 무대 감초 역할로 나오는 임하룡은 이 짧은 순간에도 잊지 못할 ‘각인의 한 수’를 보여준다. 공연에 앞서 만난 그는 “내가 좀 손을 봤다”며 웃었다.



“연출 쪽에서는 좀 착한 캐릭터로 구상했는데, 제가 단순 무식하지만 카리스마가 있는 쪽으로 연기하고 싶었어요. 무대에서 소리도 좀 지르고…. 하하.”

KBS 쇼 비디오자키의 ‘도시의 천사들’에서 맡은 쉰옥수수 역의 재연인 셈이다. 임하룡은 이 역을 통해 “아, 이 나이에 내가 하리?”, “이거 쑥스럽구만” 같은 유행어를 낳았다.

거의 모든 무대를 배제하지 않는 임하룡에게도 뮤지컬은 여전히 낯설다. 이유는 딱 하나. 노래를 불러야 하는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 임하룡. /사진=이기범 기자<br>
배우 임하룡. /사진=이기범 기자
“제가 90년대 뮤지컬 하나 했는데. 그때 AR(Audio Recorded, 노래녹음)을 떴거든요. 태생부터 박치라. 그리고 2003년 ‘풀몬티’하고 나서 거의 뮤지컬과 담을 쌓고 살았어요. 재작년에 ‘브로드웨이 42번가’ 러브콜이 왔는데도 안 한다고 했죠. 그런데 노래는 안 돼도 무대는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이번 역할이 노래가 별로 없고 연기를 주로 한다고 해서 ‘이때다’ 하고 선뜻 물었죠.”

사람들은 그가 코미디로 데뷔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뮤지컬로 데뷔했다. 1976년 뮤지컬 ‘포기와 베스’에서 노래 없는 역할을 맡은 후 제대하고 나서 극단에 들어가 배우 생활을 했다. 극단과 야간 업소 사회를 보다가 78년 개그를 시작했고 81년 TV에도 진출했다.

“그 당시에는 공채 이런 개념이 없었으니까, 무대에서 좀 한다고 하면 특채로 많이 불려갔어요. TV가 워낙 인기였으니, 자주 얼굴을 비쳤고 그러다 보니 ‘개그맨’으로 굳어진 측면이 있지요. 코미디언도 희극배우라는 뜻이잖아요. 결국 코미디나 영화나 뮤지컬이나 연극은 다 같은 일을 하는 셈이에요.”

그의 호적 이름은 임한용이다. 부를 때 발음상 ‘이만용’이 되니, 친구들이 크로마뇽인 같은 별명을 갖다 불렀다. 묘수는 ‘ㄴ’자를 최대한 줄이는 것. 성룡이나 최무룡 같은 유명 배우의 이름 끝 자를 붙이는 아이디어를 통해 지금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어릴 때 그는 얌전하고 여리고 잘 울었다고 한다. 괜찮은 집안에서 자란 덕에 중학교 땐 제천에서 서울로 유학가기도 했다. 성격이 적극적으로 바뀐 건 그때부터.

“아버지가 저 혼자 서울로 보냈는데, 혼자 있으니 만화니 영화니 신문물을 죄다 맛봤어요. 그중 트위스트라는 춤도 유행했는데, 그거랑 제가 개발한 춤 섞어서 ‘다이아몬드 스텝’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걸 완성해 놓고 아버지한테 ‘논다’며 다시 불려간 거예요.”

이번엔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이 났다. 제천에 다시 혼자가 된 임하룡은 서울에서 갈고 닦은 춤 실력을 학교에 전파하며 재간둥이로 이름을 떨쳤다.

“그땐 춤추는 학생이 거의 없어서 이런 모습이 하나의 재능으로 비쳤어요. 그때부터 영화배우를 꿈꿨죠. 허장강 선생처럼 재미있는 악역을 제일 좋아해서 막연히 꿈꾸고 있었는데, 야간 업소에서 전유성, 김학래 등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개그맨의 길로 들어섰어요.”

임하룡은 1976년 뮤지컬 '포기와 베스'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TV에서 가장 얼굴을 많이 드러낸 장르가 코미디여서 그렇지, 그가 하는 모든 연기는 '배우'라는 공통 분모에서 나온다. /사진=이기범 기자<br>
임하룡은 1976년 뮤지컬 '포기와 베스'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TV에서 가장 얼굴을 많이 드러낸 장르가 코미디여서 그렇지, 그가 하는 모든 연기는 '배우'라는 공통 분모에서 나온다. /사진=이기범 기자
코미디와 개그를 할 때도 그는 ‘연기’를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연기력이 요구되는 콩트에 주로 투입됐다. “중간중간에 사이코드라마를 또 많이 했어요. 정신병원 환우와 함께 애드리브를 쌓으면서 연기력도 나름 늘었던 거 같아요. 혼자 나서서 하는 개인기보다 같이 협력에서 하는 콤비 플레이에 더 장점이 많은 캐릭터였죠.”

‘묻지마 패밀리’, ‘웰컴 투 동막골’ 같은 영화에서도 인상 깊은 연기로 이름 석 자가 고스란히 각인됐다. 심형래가 ‘원톱’을 달릴 때도 임하룡은 그에 못지않은 유명세를 탔다.

“예전에 인기 척도는 조기축구회에서 결판났어요. 이덕화, 이주일, 임채무 선배들이 조기 축구하면 그 뒤로 줄을 엄청 섰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 제 뒤로 줄을 서는 거예요. 당시 심형래랑 같이 콤비 극을 했는데, 그 덕을 보면서 저도 인기를 누린 거죠. 노래도 잘 못해, 개인기도 없지만 같이 하면 좀 된다니까. 하하.”

그의 숨겨진 재능 하나 더 말하자면 그림 실력이 또 보통이 아니다. 얼마 전엔 피카프로젝트가 기획한 ‘지구사랑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운전 같은 속도에는 겁이 많은데, 그림 같은 정적인 것에는 사족을 못 쓴다”며 “종이와 연필만 있어도 내겐 그림”이라고 했다.

"이 나이에 내가 하리?"라는 유행어를 만든 개그맨 겸 배우인 임하룡은 세월이 갈수록 하고 싶은 장르가 많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그는 "이 나이에 못할게 뭐가 있냐"며 "코미디언이든 뮤지컬 배우든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결코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사진=이기범 기자<br>
"이 나이에 내가 하리?"라는 유행어를 만든 개그맨 겸 배우인 임하룡은 세월이 갈수록 하고 싶은 장르가 많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그는 "이 나이에 못할게 뭐가 있냐"며 "코미디언이든 뮤지컬 배우든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결코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사진=이기범 기자
이것저것 다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철학은 ‘우물 파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 우물만 팠을 때 물이 안 나오면 다른 데서 물을 파야죠. 물이 나오면 다행인데, 안 나오면 다른 데를 찾아야지. 우물 파다가 석탄 파는 게 아니니까.”

코미디, 드라마, 뮤지컬, 영화 등 분야는 달라도 극이라는 공통의 ‘우물’을 여러 개 판다는 얘기였다. “‘개콘’이 끝나면 코미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분야로 녹아 갔다고 생각해야죠. 이 분야도 내 분야다 이런 마음을 가져갈 필요가 있어요.”

임하룡은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며 “맡은 역할이 작아도 작업 자체를 즐긴다”고 했다. ‘젊은 오빠’라는 유행어를 만들고 나서 남들이 여전히 따라 쓰는 걸 보고 “내 정신연령은 39”라고 정리하는 그다. 그 젊음 앞에, 그리고 채워지지 않은 열정 앞에 “이 나이에 내가 하리?”라는 물음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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