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 총수가 콜센터를 찾은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며 "구 회장이 평소 강조한 '고객가치'를 여실히 보여준 행보"라고 말했다.
구 회장이 별도의 취임식을 열지 않은 것이나 '회장' 대신 '지주사 대표'로 불러달라고 한 데서 실용주의의 면모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구 회장은 매년 상·하반기 두차례 열리던 사업보고회도 올해부터 하반기 한차례로 축소했다.
한 LG 관계자는 "구 대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담당 임원은 물론 부장급에게도 직접 연락할 정도로 소통한다"며 "단순하게 소탈한 차원을 넘어 기존 관습을 깨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고 전했다.
◇"돈 안되면 접어라"…구광모식 '선택과 집중'
성장이 지체되는 사업은 과감히 접고 미래 유망 사업에 집중하기 위한 사업 효율화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LG전자 (96,800원 ▼200 -0.21%)는 연료전지 사업 청산 및 수처리 사업을 매각했고 LG화학 (440,000원 ▼4,000 -0.90%)은 LCD(액정표시장치) 편광판 사업을 떼냈다.
LG유플러스도 전자결제(PG)사업을 매각했다. 국내 전자결제 분야 2위 사업부를 비교적 적은 금액(3560억원)에 스타트업에 넘기는 결정에서 구 회장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묻어난다는 평가다. 이익을 내는 분야라도 비핵심 사업은 5G(5세대 이동통신)·스마트홈 등 주력 사업 집중을 위해 과감히 칼을 댄 것이다.
LG전자 등이 보유한 중국 베이징 트윈타워 지분을 매각, 1조3700억원의 실탄을 확보하면서 대형 M&A(인수·합병)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분석도 나온다. LG디스플레이 (10,580원 ▼50 -0.47%)는 국내 TV용 LCD 생산라인을 연말까지 정리하는 구조조정과 함께 2017년 이후 가동을 중단한 구미 2·3공장(9만여㎡) 부지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평택 스마트폰 생산라인을 베트남으로 이전한 데 이어 지난달 구미사업장 TV 생산라인을 인도네시아로 이전한다고 밝혔다. 미래 경쟁력 확보와 글로벌 사업 경쟁력 확보를 최우선한 결단이다.
◇車전장·AI…먹거리 찾는 발빠른 행보
구 회장 취임 직전 1조4440억원 규모의 오스트리아 자동차 헤드램프 제조업체 ZKW 인수도 진행됐다.
인공지능(AI) 분야의 투자와 인재 채용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LG는 2018년 캐나다 토론토대와 'AI 동맹'을 맺은 지 2년만에 이 분야 최고 권위의 국제학회 '2020 CVPR'에서 아마존을 따돌리고 종합 1위를 차지했다.
국내에서는 64년 만에 정기공채를 없애고 연중 상시 선발체계를 도입, 미래 준비의 핵심 동력인 인재 확보에 한층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지난해 LG화학 CEO(최고경영자)로 1947년 창립 이래 첫 외부 인사인 신학철 3M 부회장을 선임하고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LG생활건강의 34세 심미진 상무를 전격 승진시킨 것도 능력주의 채용 기조를 보여주는 사례다.
◇시총·보유현금 우상향…"도전 장려 분위기 확산"
시장에서는 올 2분기 말 ㈜LG의 보유 순현금이 1조7000억원으로 역대 최고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그룹의 전체 시가총액은 최근 100조원을 돌파, 지난해 말보다 10조원 이상 늘면서 현대차와 3위를 다툰다.
재계 관계자는 "사내 복장부터 회의, 보고 전반에 걸쳐 격식보다 내용에 치중하는 문화가 자리잡았다"며 "밀레니얼 세대에 맞는 기업문화가 정착되면서 사내 전반에 도전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더욱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혁 기자·박소연 기자
"싸울 땐 독하게 손잡을 땐 확실히"…구광모 2년, 경쟁의 판 바꿨다
오는 29일 구광모 회장 취임 2년을 맞는 LG그룹에 대한 재계 안팎의 평가다. 구 회장의 외부 행보가 잘 드러나지 않다 보니 잠잠해 보이지만 미래시장 선점 경쟁에서 단호한 의사결정이 쏟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사례가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118,400원 ▼2,300 -1.91%)의 전기차 배터리 기술 유출 소송전이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소송을 제기해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최종판결이 나오는 오는 10월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국제적으로 관심을 받은 이 소송을 통해 지적재산권 보호를 최우선하겠다는 구 회장의 원칙이 시장에 각인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LG생활건강 (386,500원 ▼5,500 -1.40%)이 애경산업 (18,250원 ▲1,840 +11.21%)을 상대로 낸 치약 상표권 소송도 구 회장의 이런 지론이 반영된 결단이었다는 평가다. LG전자는 삼성전자 (80,800원 ▲1,000 +1.25%)와 TV, 건조기, 의류관리기 등 가전시장에서 제품명칭과 기술력을 두고 갑론을박을 이어가고 있다. 모두 구 회장 취임 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장면이다.
LG그룹의 변신 이면에는 미중 무역전쟁과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부상과 4차 산업혁명 가속화로 인한 기술패권 경쟁 심화 등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구 회장도 지난해 9월 사장단 워크숍에서 이런 인식을 드러냈다. 구 회장은 당시 "전례 없는 위기에 제대로, 그리고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는 각오로 변화를 가속해달라"고 말했다.
LG디스플레이가 주도하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사업에서도 LCD(액정표시장치) 저가 공세로 디스플레이 시장 주도권을 빼앗아간 중국업체의 추격이 만만찮다.
LG그룹이 경쟁사와 각만 세우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 조직개편에서 LG사이언스파크의 오픈이노베이션실(개방형 혁신실)을 '부장'급 조직에서 '담당(준임원)'급 조직으로 격상하는 등 그룹 차원에서 외부협력을 통한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계열사에서는 LG전자와 LG유플러스가 인공지능(A) 분야에서 독자 노선을 걷기보다 마이크로소프트·구글·아마존 등 글로벌 경쟁사는 물론, 네이버 등 국내업체와 플랫폼 협업을 시도하면서 시장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LG화학도 바이오 부문 혁신기술 공유에 초점을 둔 'LGC 생명과학포럼'을 지난해까지 2년 연속 개최했다.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는 지난 22일 구 회장이 직접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과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재계 관계자는 "구 회장이 '일등 LG' 복원을 목표로 큰 그림에서 변화를 꾀하다 보니 공격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며 "부딪힐 때는 부딪히고 손 잡을 때는 손잡는 방식이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