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 한복판에, 치마를 입고 섰다. 지나가던 행인에게 찍어달라고 했다. 당당한 척하지만, 실은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사진=명동 행인
어느 주말이었다. 아내와 난 저녁을 먹으며, 벌써 다섯 번째 사망한, 내 바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인(死因)은 바지의 한계점을 고려하지 않은, 두 다리의 장력 때문이랄까. 쉽게 말해, 하체가 뚱뚱한데 의자에 자꾸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니 가운데 부분이 터진 거였다. 수선 비용이 3000원인 것까지 외울 정도였다. 아내는 실소를 터트렸다. 영 면목이 없었다,
내 바지야, 고생이 많다./사진=남형도 기자
난 치마를 체험해보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렇게까지 돈을 벌진 않아도 된다고, 그 정도로 집이 어렵진 않다고 했다.
그래서 난 아내에게 진지하게 얘기했다. 38년 동안 바지를 입었었고, 중요 부위가 상당히 억압돼 있었다고. 왼쪽으로 향할지, 오른쪽으로 갈지 항상 갈팡질팡했다고. 그러니 어쩌면 치마는 남성에게 더 적합한 옷인지도 모른다고. 그로 인해 몇몇 남성들이 치마를 입고, 그래서 그곳이 좀 더 시원해지고, 그러면 저출산 해결에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그것이 '나 비효과(화려한 치마가 나를 감싸네)'라고 말이다.
내 멘탈이 허락하는 데까지 체험해보기로 했고, 정확히 이틀(15~16일)을 채웠다. 치마를 벗으면서 거실 바닥에 쓰러졌고, 장장 10시간을 푹 자고 일어나 다시 두통약을 먹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다음은 나를 스쳐 간 두 벌의 치마를 추억하며, 세세하게 남긴 기록들이다.
치마를 처음 사러 갔다
사실 이 치마를 사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사진=남형도 기자
기왕 사는 거 취향에 맞게 잘 사고 싶었다. 월요일(15일) 점심에 명동에 갔다. 매장 한 곳에 들어갔다. 형형색색의 치마들이 날 유혹했다. '트로피컬(열대 지방의)' 느낌이 나는 치마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취향 저격이었다. 돈 없어서 못 간, 하늘빛 몰디브 해변이 떠올랐다. 그러나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발걸음을 아쉽게 돌렸다.
첫 도전이니 조금 무난한 걸 고르기로. 밝은 푸른빛이 감도는 부들부들하고 시원한 재질의 치마를 집었다. 살짝 주름이 지지만, 전반적으로 평범한 편이었다. 옷걸이에서 빼내어 두어 번 접었다. 그리고 3층에 있는 남성 탈의실로 향했다. 심장이 괜스레 쿵쿵거렸다. '난 부끄럽지 않아', '그냥 호기심 많은 서른여덟 살이야', 하체가 더운 것뿐이야', 그리 자기 암시를 했다.
이 치마가 그나마 도전해볼만한 것 같아서, 입어보기로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탈의실 에어컨 바람이 치마 안으로 솔솔 들어왔다. 긴장하느라 더워진 다리가 찬바람과 만나 시원해졌다. 난 묘한 황홀감을 느꼈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잠시 그 기분을 만끽했다.
아내에게 치마 입은 모습을 보여줬더니 매우 웃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카톡
명동 한복판에서 치마를 입고 거닐다
통풍이 잘돼 참 시원했다. 여름엔 치마가 제격인 것 같다./사진=남형도 기자 뒤통수 셀카
걷는 기분이 이리 가뿐했었나. 두 다리가 참 홀가분했다. 빙 둘러 감싸는 게 없었고, 중요 부위를 압박하던 것도 사라졌다. 걸을 때마다 허벅지에 닿는 치마의 가벼운 느낌, 그 틈으로 공기가 살포시 들어와 스쳐 갔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도 참 편하다./사진=남형도 기자 셀카
다소 불편한 점도 있었다. 우선 구매한 치마엔 주머니가 없어서, 스마트폰과 지갑을 손에 들어야 했다. 무심코 주머니 쪽에 손을 찔러 넣으려다, 허전하단 걸 깨달았다. 뭘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적응하는 데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또 하나는 허벅지살이 많아 걸을 때마다 양옆이 살짝살짝 쓸린다는 것. 땀이 차기 시작하니, 마찰력이 증가해 쓸리는 느낌이 심해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허벅지를 살짝 벌리고,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니 다소 나아졌다. 양쪽 허벅지가 서로 닿지 않는 사람이라면, 좀 더 편할 것 같았다.
시선에 옴짝달싹, 움츠러들었다
걸을 때도, 통풍이 참 잘 된다./사진=남형도 기자
사람들 시선이었다. 반응은 반반으로 갈렸다. 알아챈 사람과 그렇지 않고 스쳐 지나간 사람. 치마 입은 걸 본 사람은, 한 번쯤은 꼭 바라보고 갔다. 눈길이 머무는 순서는 이랬다. 치마를 보고, 내 얼굴을 보고, 다시 치마를 보고. 계단에서 올라오던 한 아주머니는 "어머!"하고 외마디 말을 던졌고, 건너편에서 오던 직장인 여성 세 명은 날 가리키며 웃었다. 서로 스친 뒤 뒤돌아보진 않을까 싶어서 뒤돌아봤는데,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사에 돌아가기가 좀 두려워졌다. 고개를 숙이고 건물에 들어가니, 친절한 경비아저씨가 날 맞았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 뒤 아저씨를 보니, 내 치마를 보고 있었다.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었는데, 17층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스마트폰 친구였다. 가만히 화면을 보고, '남형도 기자'를 검색했다(심심할 때 하는 취미).
회사에서의 기본 자세. 편하니까, 업무가 더 잘 된다. 정말이다./사진=편안해서 나른한 남형도 기자
잠자코 앉아 있었다. 오후 4시쯤 됐을까,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누군가 편집국 회의 테이블에, 감자칩 과자를 갖다 놓는 게 아닌가. 평소 같으면 첫 번째로 달려갔겠으나,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며 재고 수량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조금씩 줄어들었다. 옆 상사도 가져와 내게 "하나 드셔보세요"라고 건넸다. 짭조름하고 고소하고 바삭한 게 너무 맛있었다. 이성을 잃고 치마를 펄럭이며 일어나 가져왔다. 10분도 안 돼 한 봉지를 다 비웠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상사 반응 "옆에 앉은 남기자 치마 보고 깜놀"
내릴 것인가, 올릴 것인가. 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사진=결국 내린 남형도 기자
그리 왔다 갔다 몇 번을 했고, 자주 눈에 띄었고, 치마를 입었단 걸 다들 안 것 같았다. 그래서 메신저를 통해 물었다. 보기에 어떻냐고. 다음은 그에 대한 증언들이다.
백모 후배(여) : "순간 제 두 눈을 의심했어요. 잘못 본 게 아닌가 해서요."
박모 후배(여) : "원탁 쪽으로 잠깐 오셨을 때, 기사 쓰다 슬쩍 봤어요. 잘못 본 건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살짝 일어났어요. 팀장 뒷모습을 다시 확인했어요."
구모 후배(여) : "얼핏 봐선 그냥 통바지 입으신 줄 알았습니다. 만약 길에서 봤는데 색깔이 있고 좀 더 치마 같은 옷이었다면, '저 남자 치마 입었네?'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왜 입었을까?' 이런 얘길 했을 것 같아요."
오모 후배(남) : "저는 보고 여성들이 입는 치마 같단 생각이 잘 안 들었습니다. 생각외로 되게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운동화랑 좀 안 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사에게 보여줬더니 "어머! 치마 입고 오셨어요?"하고 아연실색했다. 어떠냐 물었더니, 잠깐 일어나줄 수 있냐고 했다. 일어났더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반응을 정리해 알려주겠다고 했고, 다음날이 된 뒤에야 피드백이 왔다.
권모 상사(여) : "여자인 저도 치마를 잘 입지 않는데, 옆에 앉은 남기자가 치마 입은 것 보고 깜놀했어요. 치마를 안 입는 이유는 그에 어울리는 구두 등에도 신경을 써야 해서요. 그런데 너무 편하게 치마 입고 양말과 신발을 신은 거 보고, 그냥 치마도 바지처럼 입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잘 입게 되진 않네요."
더 짧고, 시원한 치마로
더 짧은 치마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소재가 얇아 참 시원했다./사진=실은 두려운 남기자
다음 날 아침, 치마를 입고 출근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뒤, 점심엔 새 치마를 사러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회사에서 송모 편집국장을 만나 깜짝 놀랐다. 도망가려 했는데, 타이밍이 늦었다. 송 국장은 "그렇게 입고 출근한 거야?"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했다. 그가 "누가 뭐라고 안 해?"라고 다시 묻기에, 그렇다고 다시 빠르게 답했다. 그러니 송 국장은 "안에 아무것도 안 입은 거냐"며 원치 않는 호기심을 보였다. 그래서 "속옷은 입었지요"라고 한 뒤, 재빠르게 도망쳤다.
다시 명동 매장에 갔다. 전날 눈여겨 봐둔 치마가 있었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꽃이 활짝 핀 주름치마였다. 아내 조언대로 치마를 만져봤다. 소재가 시원하고 얇았다. 집에 있는 냉장고 바지와 유사한 느낌이었다.
그걸 들고 3층에 있는 남성 탈의실로 향했다. 다행히 앞쪽에 직원이 없었다. 첫 번째 칸에 들어가 문을 닫았더니, 잠시 뒤 어떤 남성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치마 입은 날 보더니 매우 심하게 놀라며 "죄송합니다"라고 외치고 나갔다. 아래쪽을 보니 그가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있었다. 옷을 갈아입다 잠시 나갔었던 모양이었다. 바깥으로 나와 다른 칸으로 가서, 치마를 입어봤다. 흡족히 맘에 들어, 1만7000원쯤 주고 구매를 했다. 이틀새 치마가 두 개 생겼다.
치마가 짧아지니, 신경 쓰이던 것들
치마를 입고 앉아서 쉬고 있다. 다행히 다리털은 별로 없는 편./사진=남형도 기자
명동을 좀 걷다가, 더워져 가게 한 곳에 들어갔다. 물 한 통을 사며 잠시 더위를 식힐 요량이었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 가서, '니킥(무릎을 들어 올려서 치는 격투 기술) 자세'를 몇 번 취했다. 그 사이로 에어컨 바람이 대량 유입돼 시원해졌다. 맨살이라 빠르게 식힐 수 있으니, 이런 건 좋구나 싶었다.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올라갈 땐,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사진=남형도 기자
계단을 내려가거나 올라갈 때도,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아내가 "치마 입을 때 속바지를 입는다"고 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 땐, 치마가 훌렁 뒤집힐 것 같았다. 황급히 치마를 붙잡았다. 앉을 때도 다소 불편했다. 나도 모르게 다리를 모으게 됐다.
치마를 벗고, 두통약을 먹었다
가격표도 안 떼고 하루종일 입고 다녔다. 입으니까 편했는데, 사실은 벗으니까 더 편했던 것 같다. 시선 때문에./사진=남형도 기자
치마를 입어본 뒤 그간 전혀 몰랐던, 참 좋은 선택지였단 걸 깨달았다. 한여름 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선 더 그랬다. 하체를 압박하지 않아 후련했고, 중요 부위는 자유로웠고, 더울 땐 조심하며 무릎까지 살짝 올렸다. 회사에선 늘 부채질을 많이 했었는데, 치마를 입으니 때론 한기까지 느껴졌다. 몸이 편하니까 업무 효율도 좋아졌다.
바지는 불편했지만, 또 편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일지./사진=남형도 기자
스코틀랜드에선 남자도 치마를 입는단 게 잘 알려져 있다./사진=뉴스1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치마가 참 편했다고(물론 불편한 치마도 있다). 못 믿겠다면, 방문을 잠그고 몰래 한 번 입어봐도 좋다.
그게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그러면 먼 훗날 조용히 치마를 꺼내 입고, 밝은 대낮에 동네에서 '플라잉 니킥(뛰어올라 무릎을 올려 치는 것)' 몇 번을 날리며, 하체에 강풍을 불게 해 만끽할 것이라고.
복장으로 성별을 규정 지을 수 있는 것일지. 그건 누가 정해놓은 것일지./사진=남형도 기자
여기 기자를 포함한 7명의 사람들이 지하철에 서 있습니다. 누가 남성이고, 누가 여성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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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남-여-남-여=남-남
2. 여-남-여-여-남-남-여
3. 남-여-남-남-여-남-남
4. 여-남-여-남-남-여-남
5. 누구든 될 수 있다
안녕하세요, 남형도 기자입니다.
에필로그 퀴즈 정답은 5번입니다 :)
정답을 맞춰주신 독자님 다섯분을 선정해보았습니다.
네이버 독자(fbek****)님, 다음 독자(박 세희)님, 다음 독자(닉네임)님, 네이트 독자(hk41****)님, 머니투데이 홈페이지 독자(Adel Suh)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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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도 기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