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기 전 삼성전자 사장. /사진제공=삼성전자
'39년 삼성맨' 장원기 전 삼성전자 사장(사진·66)의 중국행을 바라보는 반도체·디스플레이업계 인사의 반응은 중국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였다. 12일 만난 이 인사는 "장 전 사장이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인데다 삼성이라는 브랜드까지 겹쳐 새삼 화제가 되고 있지만 중국의 인재 확보전은 오래 전부터 우려됐던 문제"라고 말했다.
중국행 소식으로 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장 전 사장은 198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S-LCD(삼성·소니 합작법인) 대표, 삼성전자 LCD(액정표시장치)사업부장(사장), 삼성전자 중국본사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2017년 퇴임한 뒤 3년 동안 퇴직임원 예우를 받다가 지난해 말 예우 기간이 끝나자 중국 디스플레이 구동칩셋 제조업체인 에스윈의 부회장(부총경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성 사장급 출신 인사 가운데 중국 경쟁사로 자리를 옮긴 이는 장 전 사장이 처음이다. 장 전 사장이 현업을 떠난 지 상당 시간이 지났고 최신 기술을 보유한 인력은 아니지만 업계에서 장 전 사장의 중국행에 비상한 우려를 드러내는 이유다. 삼성 최고경영자의 중국행 자체가 국내 핵심인재 유출의 부정적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삼성전자 고위 임원 출신이 중국 회사의 부회장을 맡는 것은 중국이 한국 인재 영입에 나설 때 그럴 듯한 배경으로 활용될 수 있다"며 "중국 진출을 고심하던 국내 인력이 빨려가는 부작용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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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2008년부터 첨단산업 분야에서 '천인계획'(1000명의 인재 확보 계획)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기업 인재를 대거 스카우트 해왔다. 2018년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핵심인재 2명을 스카우트하려다가 소송전으로 비화한 사건도 있다.
반도체 학계의 한 인사는 "미국 정부가 중국의 '천인계획'을 겨냥해 칼을 빼든 게 중국의 한국 인재 확보전을 다시 부추긴 측면이 있다"며 "장 전 사장 사례는 글로벌 인재 스카우트 통로가 막힌 중국이 주변국인 한국 인력 영입활동을 재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검찰은 올 1월 나노 테크놀로지의 아버지로 불리며 노벨 화학상 후보로도 거론된 찰스 리버 하버드대 화학·생물학과 교수를 천인계획에 참여한 사실을 숨긴 채 지적재산권을 중국에 빼돌린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미국 에너지부도 부처 직원을 포함해 미국 정부와 계약을 맺은 연구자에게 미국에 적대적인 외국 정부가 후원하는 인재유치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말라며 사실상 중국의 천인계획을 정조준했다.
업계에서는 중국업체들의 한국 기술진 대우가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나오지만 기존 연봉의 3배가 넘는 고액 연봉과 거주비, 교육비 지원 등 파격 대우는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30~50대 기술진의 경우 한국에선 경쟁이 치열하고 정년보장도 힘들어 중국을 기회로 여길 수 있다. 장 전 사장처럼 정년퇴직했지만 일에 대한 목마름이 여전한 베이비붐 세대에게도 중국업체의 제안이 반가울 수 있다.
첨단 산업에서는 기술 개발에 들어가는 인건비만 해도 수백억원에 달한다. 중국업체 입장에서는 한국인 개발자를 영입하면서 기존 연봉의 10배를 제시하더라도 비용이 적게 드는 셈이다. 설계도면 같은 자료를 빼돌리는 행위는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라 처벌되지만 단순히 회사를 옮겨 노하우를 전하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다.
서광현 디스플레이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40~50대 퇴직자는 중국으로 한번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며 "고용을 유지하고 특허 기술 개발에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게 절실하다"고 밝혔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지난 3~4년 동안 중국을 향하는 인재들을 어떻게 막을까에 집중했지만 효과가 낮았다"며 "국내 환경을 개선하고 맞춤형으로 지원해 중국행보다 한국에 남는 게 낫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