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했던 엄마, 가수 조공에 수십만원"…'덕질'에 빠진 5060

머니투데이 이동우 기자 2020.06.02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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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 예능프로그램 '미스터트롯' 톱7 멤버들 /사진=뉴에라프로젝트 공식 SNSTV조선 예능프로그램 '미스터트롯' 톱7 멤버들 /사진=뉴에라프로젝트 공식 SNS


"자~ 하나, 둘… 아니 좀 더 가깝게~."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지하철 1호선 신도림역. 오가는 인파 속에서 중년 남녀가 차례로 한 전광판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이들 뒤로는 '미스터트롯'에 출연한 인기 가수의 얼굴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흡사 지하철 '아이돌 광고'의 성지로 불리는 2호선 삼성역에 온 듯한 광경이다. 10~20대 K팝 팬들이 50~60대 트로트팬으로 바뀐 것만 빼면 그랬다. 아이돌 팬덤의 전유물이던 지하철 전광판 광고가 어르신의 '팬질'까지 전염된 모습이다.



우리 가수 전광판 찾아 '성지순례'…팬덤 문화로
 서울 강남구 삼성역에 설치된 펭수 데뷔 300일 기념 지하철 광고를 관광객들이 지나가며 바라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서울 강남구 삼성역에 설치된 펭수 데뷔 300일 기념 지하철 광고를 관광객들이 지나가며 바라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하철 광고는 아이돌 팬 문화의 대표 격이다. 팬들이 가수에 대한 사랑을 드러냄과 동시에 여타 팬덤을 향해 화력을 과시한다. 지하철 광고를 조공받은 가수는 현장을 찾아 인증 사진을 남기고, 팬들도 광고를 찾아 순례하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지하철에 게재된 아이돌·유명인 광고건수는 2166건에 달한다. 매일 지하철에서 약 5.9건의 광고를 마주칠 수 있는 셈이다. 아이돌 지하철 광고가 태동한 2014년 이후 매년 증가세다.

이들 광고 가운데 세계적인 인기의 방탄소년단(BTS)가 227건으로 가장 많은 개수를 기록했다. EXO(엑소) 165건, 지금은 해체한 워너원이 159건, NCT 127건 등이 뒤를 이었다. 여자그룹은 IZ*ONE(아이즈원) 40건, 트와이스와 블랙핑크가 각각 22건을 차지했다.

광고에 드는 가격은 가장 인기가 많은 2호선 삼성역 기준 한달 최대 450만원 정도다. 팬들은 광고 집행에 드는 비용을 팬카페 등에서 십시일반 모아 조달한다. 응원하는 그룹에 대한 상시 광고와 함께 멤버별 생일 등 기념일을 두고 개별 광고를 진행하는 식이다.


"우리 엄마가 이럴 줄이야" 트로트에 팬심 폭발 5060
팬들이 1일 오전 인천광역시 중구 한 스튜디오 앞에서 '미스터트롯 : 사랑의 콜센터'에 출연하는 김호중을 응원하고 있다. / 사진=뉴스1팬들이 1일 오전 인천광역시 중구 한 스튜디오 앞에서 '미스터트롯 : 사랑의 콜센터'에 출연하는 김호중을 응원하고 있다. / 사진=뉴스1
'미스트롯'부터 '미스터트롯'으로 이어지는 중장년 세대의 팬 문화는 날이 갈수록 진화한다. 음원사이트 순위권 진입을 위한 '스밍'(스트리밍)부터 기념일 '조공'(스타에게 팬들이 선물) 문화까지 10대의 팬 문화를 꼭 빼닮았다.

이들은 팬카페를 중심으로 자신들이 응원하는 가수에 대한 화력지원을 논의한다. 음원 활동은 물론 방송출연, 광고까지 전방위적이다. 이런 영향에 임영웅, 영탁 등 미스터트롯 톱7을 모델로 쓴 제품은 매출이 급증했다. 전세버스로 정동원의 고향을 찾는 팬들의 발걸음에 경남 하동군은 아예 '정동원길'을 만들기도 했다.

중년 세대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지켜보는 청년 세대의 시선은 어떨까.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다. 회사원 김모씨(28)는 "부모님이 얼굴만 보면 미스터트롯 얘기를 하셔서 난감하다"면서도 "당혹감이 우선 들지만 엄마가 '삶의 낙'을 찾고 소녀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고 말했다.

취준생 임모씨(29)도 "어머니가 미스터트롯 조공에 수십만원을 쓰셔서 이해가 걱정이 된다"며 "틈만 나면 가수 영상부터 찾아볼 정도로 좋아하셔서 말도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OPAL 세대의 등장? 대세 문화에 "취향 숨길 필요 없어"
서울 종로구 세종로 네거리에서 시민들이 출근하고 있다.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서울 종로구 세종로 네거리에서 시민들이 출근하고 있다.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이런 변화를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트렌드코리아 2020'에서 '오팔'(OPAL·Old People with Active Lives) 세대의 등장으로 봤다. 이들은 문화적 소비력이 왕성한 5060 신중년으로 규정된다. 그간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알려진 '덕질'을 하며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오래전 청바지, 미니스커트 같은 히피 문화가 청년 세대에서 기성세대로 옮겨간 것처럼 기성세대는 젊음을 부러워하고 쫓아가려는 심리가 있다"며 "트로트가 대세가 된 지금은 취향을 숨길 필요 없어 더 적극적으로 즐기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곽 교수는 "나이 든 세대가 즐길 만한 문화가 부족한 데 그런 측면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며 "젊은 세대의 팬덤 문화를 기성세대가 따라 하며 세대 간 소통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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