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오케스트라 찾아가는 금난새 “여성 때리는 남성 보고 결심 서”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20.05.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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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올해 지휘자 데뷔 40주년 맞은 ‘거장’ 금난새…돈키호테적 도전과 파격의 대명사 된 배경은

올해 지휘자 데뷔 40주년을 맞은 금난새. 그는 엘리트 클래식 현장에 머무르지 않고 소외된 지역을 찾아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의 부흥을 꿈꾸며 실천해왔다. /사진=김휘선 기자<br>
올해 지휘자 데뷔 40주년을 맞은 금난새. 그는 엘리트 클래식 현장에 머무르지 않고 소외된 지역을 찾아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의 부흥을 꿈꾸며 실천해왔다. /사진=김휘선 기자


이 지휘자와 인터뷰를 하기 전 머릿속에 맴도는 단 하나의 질문은 ‘왜’였다. 서울예고, 서울대, 독일 베를린 음대 등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는 ‘더 높은 곳’을 향해가는 게 일반 상식인데, 그는 보수적 클래식계에서 되레 ‘튀는 옷’을 갈아입고 매번 자신을 실험대에 올려놓았다.



편하고 우아하게 모양내며 살 법도 하지만, 그의 음악 인생에서 안주와 안락은 ‘금기어’로 인식되는 듯했다. 대신 도전, 창조, 아이디어, 열린 마인드 같은 자유로운 열정과 가치실현을 위한 행복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김녕 김씨 성을 달고 태어났지만, 아버지 세대부터 ‘금’씨를 썼다는 이유로 대법원까지 소송을 벌여 지금의 성을 획득한 것부터 도전 역사의 시작이었다.



73세 나이에도 꼿꼿한 허리와 40대 못지않은 동안(童顔), 귀공자풍의 말투와 부드러운 매너만 보면 ‘안락의 상징’으로 살아온 인생처럼 비치는 데, 표피 뒤로 숨은 내공과 철학의 흔적을 따라가니 매 순간이 의외의 연속이다.

국내 1호 지휘자 금난새는 자신을 ‘금혁명’이라고 했다. 그는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순응하는 사람은 아니다”며 “내 이름 속 의미에는 혁명이 있고 그것은 도전, 창조, 돈키호테 같은 상징어들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금난새는 1977년 카라얀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4위로 입상한 뒤 80년 KBS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으면서 데뷔했다. 올해 지휘자 데뷔 40주년을 맞은 그는 반세기 가까운 음악 생활의 소회에 대해 “디스 이스 마이 파티”(This is my party, 여긴 내 무대야)라는 말로 정리했다.


“기업들이 아무리 돈을 댄다 해도, 그날의 주인공은 우리 연주자라는 얘기입니다. 스폰서 눈치를 따라갈 때 연주는 의미와 목적을 상실해요. 우리가 주인의식을 갖고 무대를 즐겨야 관객도 함께 즐길 수 있고, 축제는 재미있고 행복하게 이어질 수 있는 거예요.”

3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하는 동안, 지친 기색을 내보인 쪽은 인터뷰어였다. 지난 2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그의 여전히 식지 않은 도전과 열정을 따라가 봤다.

지휘자 금난새는 부드러운 말투와 매너와 달리, 행동으로는 돈키호테적으로 도전과 파격을 일삼는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는 클래식 스타라는 겉치레를 버리고 로비든 들판이든 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공연하거나 일선 청소년 교육 현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거나 교장 연봉 4년치를 학교에 기증하는 식으로 대중과 소통해왔다. /사진=김휘선 기자지휘자 금난새는 부드러운 말투와 매너와 달리, 행동으로는 돈키호테적으로 도전과 파격을 일삼는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는 클래식 스타라는 겉치레를 버리고 로비든 들판이든 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공연하거나 일선 청소년 교육 현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거나 교장 연봉 4년치를 학교에 기증하는 식으로 대중과 소통해왔다. /사진=김휘선 기자
-KBS 교향악단(현 국립교향악단) 지휘자로 데뷔하면서 도전이 시작됐는데.

“KBS에서 12년 있었다. 독일 유학 시절 경험 때문에,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고 싶어서 처음으로 지방 공연을 떠났다. 그렇게 12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1년에 2번은 무조건 지방에 가서 ‘서울에만 있는 문화공연’의 한계를 깨고 싶었다.”

-독일 유학 경험이 ‘기존 질서’를 바꾸는 계기였나.

“어릴 때 TV에 나온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을 보고 감명받아 지휘자의 꿈을 꿨다. 당시로써는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아무도 그 길을 가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독일로 무작정 떠나 라벤슈타인 교수를 만나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더니, 다음날 바로 자기 수업에 들어오라고 했다. 내 눈빛에서 엄청 하고 싶어하는 의지를 읽었다고 교수가 나중에 설명하더라.(웃음) 모든 수업을 공짜로 받으면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방법도 터득했다. 귀국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재능있는 연주자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 더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KBS에서 수원시향으로 옮긴 건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내려간 꼴인데.

“지금도 둘 중 하나 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후자다. 수원시향은 당시 파산 직전이라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적극 나서게 된 케이스다. 갈비가 유명한 수원에서 오케스트라로 자랑이 됐으면 하는 생각으로 갔다. 그때 삼성이 자진해서 10억원을 지원하려고 하길래, 많은 돈을 한꺼번에 주면 지원하고 행복한 결과가 안 나왔을 때 지원이 모두 끊기니, 4억원씩 5년간 해달라고 부탁했다. 수원은 3년 만에 활성화했고, 시민이 자주 찾는 클래식 메카로 떠올랐다. 그렇게 6년을 수원에서 보냈다. 당시 순수 예술들은 모두 정부 지원을 받으며 유지되고 있었다. 지원을 받으면 안락한 유지는 가능하지만, 성장과 발전이 없다. 제도권 지원은 그래서 위험할 수 있다. 서울대 교수가 지방국립대 가서 가르치는 식으로 순환 고리가 이어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자그마한 ‘혁명’을 꿈꾸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

“이런 얘기가 도움될지 모르겠으나 고등학교 시절 기억 때문이다. 한번을 버스를 탔는데, 어떤 어른이 여성 차장(車掌, 승무원)을 때리는 데 그걸 보고 있으니 너무 화가 나더라. 내가 힘이 셌으면 제지했겠지만,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고 용감한 사람이 되려고 나름 노력했다. 또 하나는 카라얀 콩쿠르에서 입상했을 때보다 나를 가르친 선생님한테 인정받을 때 더 기뻤던 기억이다. 입상도 객관적으로는 의미가 크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도리’에서 오는 기쁨이 더 많은 충족감을 줬다.”

그의 도전과 파격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경기도 지사는 금난새가 국내 최초로 만든 민간 벤처 오케스트라 ‘유라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현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고 “독특한 지휘자다. 어떻게 민간 오케스트라가 이렇게 잘하느냐”며 제의해 경기도립오케스트라 예술감독(2006~2010년)을 맡았고 이후엔 인천 시장의 부탁으로 인천시립예술단 상임지휘자(2010년)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전국 곳곳에 신경망처럼 손댄 수많은 오케스트라는 ‘부흥’이라는 공통분모로 엮였다. 단발성 계약직이 아닌 최소 3년 이상 몸담으며 성과의 과정이 낱낱이 공개된 노력과 열정의 성적표였던 셈이다.

-잘 차려진 밥상보다 초라한 곳에서 역량 키우는 데 관심이 많은 듯하다.

“수원시향을 맡으면서 면역력을 높인 것 같다. 어디서 지휘하는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어떻게 발전하고 도움이 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13년 전, 계원예고에서 오케스트라 지휘가 필요한데 ”몸값 비싼 분이 오실까“하며 망설이다 결국 조심스럽게 제의를 한 적이 있는데 ”노 프라블럼“(No problem) 하며 달려가서 성의를 다해 연주했다. 연주 끝나고 모두 울었다. 그 소식을 들은 경북예고에서 ‘명예교장’을 부탁하길래, 수락했고 지금은 매년 방문하고 있다. 목적은 하나다. 교육의 발전이다. 재판관처럼 심판만 하는 선생이 아니라, 같이 하면서 그들에게 재미를 부여하고 성장시키는 벗이 되는 것이다.”

꼿꼿한 허리와 동안으로 세월의 흔적을 비껴간 듯한 금난새는 올해 73세의 노장이다. 그는 "아직 지휘봉을 드는 데 문제가 없다"며 "그만둬야할 때가 오면 다른 현장에서 클래식 보급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사진=김휘선 기자<br>
꼿꼿한 허리와 동안으로 세월의 흔적을 비껴간 듯한 금난새는 올해 73세의 노장이다. 그는 "아직 지휘봉을 드는 데 문제가 없다"며 "그만둬야할 때가 오면 다른 현장에서 클래식 보급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사진=김휘선 기자
-2013년엔 서울예고 교장 자리도 제안받았다. 지난해까지 하다 논란도 있었는데.

“이사장이 지휘자로 일하되 남는 시간에 학교를 맡아달라고 해서 수락했는데, 누군가 행정업무 소홀로 민원을 제기해 지난해 사임했다. 교육에 대한 관점 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4년간 받은 연봉을 학교에 다 기증했다. 내가 독일에서 무료로 공부한 기억이 있으니, 교장으로 번 돈은 내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교장으로는 사임했지만, 이사장이 명예교장으로 추대했다. 내년 가을쯤 1000석 짜리 학교 콘서트홀이 완공되는데, 음악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은 상태다.”

클래식이 사장(死藏)의 길 문턱에서 우왕좌왕할 때 나침반 역할을 한 주역이 금난새다. 제도권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펼친 대중화 작업들, 열악하고 숨겨진 오케스트라를 찾아다니며 활력을 불어넣고 수준을 끌어올린 질적 다변화, 나르시즘에 빠진 폐쇄적 개인화를 기업과 손잡고 산업화로 확대한 공과(功課) 등이 그렇다.

이는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해설이 있는 음악회’ ‘금난새와 떠나는 오페라 여행’ 같은 프로그램은 유물 같은 클래식을 현재의 이야기로 소환했고, 특히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는 전회 공연 매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관객이 선정한 티켓 파워를 알 수 있는 인터파크 ‘골든 티켓 어워즈’ 수상은 3년 내내 그의 독차지였다. 삼성을 시작으로 포스코, CJ 등 기업과 손잡고 클래식 저변을 확대한 시간만 10년이 훌쩍 넘는다.

-지휘자로 시작해 지금은 클래식 산업화의 경영인 이미지가 많다.

“내가 콩쿠르 입상할 때 학생이었다. 당연히 매니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안 했다. 다른 입상자들은 모두 매니저가 있고 출판사가 있고 음악의 시장이 있었다. 우리 국악인에 매니저가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순수예술은 산업화를 배제하려는 경향이 그만큼 큰 셈이다. 클래식이 활성화하려면 이런 연계 시장들이 활발하게 전개돼야 한다. 시장을 움직이는 손들 말이다. 개인이 노력해서 클래식 스타가 되면 금메달처럼 자랑은 될지 모르나, 산업을 키우고 교육을 발전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시대가 온 만큼 이제 클래식 음악도 콘서트만 하는 박물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로비, 축구장, 들판 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요구하는 수요층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하고, VR(가상현실) 시스템을 응용한 새로운 기획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가 주는 지원금에 의지하기보다 기업들과 만나 창의적 아이디어로 판을 키우고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전략이 필요하다.”

1977년 카라얀 국제음악 콩쿠르에서 학생 신분으로 4위에 입상한 뒤 80년 KBS 교향악단에서 지휘봉을 잡아 국내 최연소 지휘자로 이름을 올렸다. /사진=김휘선 기자<br>
1977년 카라얀 국제음악 콩쿠르에서 학생 신분으로 4위에 입상한 뒤 80년 KBS 교향악단에서 지휘봉을 잡아 국내 최연소 지휘자로 이름을 올렸다. /사진=김휘선 기자
-지난 40년간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역시 교육이다. 8년 전쯤, 서울 30개 대학 오케스트라 동아리 대표가 와서 나와 아주 어려운 곡을 예술의전당에서 도전하고 싶다고 해서 ‘오케이’했다. 그때 새로운 희망을 본 것 같았다. 음악을 전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동아리가 중요한데 그것이 곧 국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KUCO·Korea United College Orchestra)의 탄생이었다. 2010년 20개 군 단위로 만든 농어촌희망청소년오케스트라(KYDO·Korea Young Dream Orchestra)도 그렇다. 단순한 음악교육을 넘어 열린 공동체정신과 소통에 방점이 찍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우리가 KYDO와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는 기억이 결국 우리의 미래인 셈이다.”

금난새의 음악적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금난새는 “아버지가 음악의 이론가라면, 어머니는 예술가적 기질이 넘쳤다”고 했다. 피아노를 배운 적 없는 어머니는 어디서 들은 음의 조성을 그대로 재연해냈다고 한다. 독특하고 돈키호테적 성격은 아버지를 빼닮았다.

현재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자 성남시립예술단 예술 총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는 금난새가 도전과 파격의 행보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저의 이런 행보가 과연 오케스트라를 위해 보람이 있는가, 우리 사회를 위해 뭘 더 할 수 있을까만 늘 생각해요. 매년 100회 이상의 공연을 해오면서 이제 손 감각도 떨어지지만, ‘그만둬야 할’ 느낌이 오기 전까진 지휘봉을 잡을 겁니다.”

코로나19로 잠시 ‘안식년’을 갖게 된 ‘그의 파티’가 곧 시작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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