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안 지키면 수천억 피해보상…"투자자가 나서야 기업이 바뀐다"

머니투데이 김사무엘 기자, 황국상 기자 2020.05.2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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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새로운 10년 ESG] 12-투자자 소송 활발한 해외선 지배구조 이슈 중요

편집자주 ESG(환경, 사회적책임, 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ESG 친화기업에 투자하는 글로벌 자금은 30조 달러를 넘어섰고, 지원법을 도입하는 국가도 생겨났습니다. ESG는 성장정체에 직면한 한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단이자 목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2020 새로운 10년 ESG’ 연중기획 기획을 통해 한국형 자본주의의 새 길을 모색합니다.

"기업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원칙을 보다 잘 준수하게 하려면 투자자들의 책임이 가장 중요합니다. 투자자들이 경영진의 잘못으로 주가 하락 등 피해를 입고도 아무런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시장에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투자자 소송 전문회사인 드미노 리커버리 서비스(Deminor Recovery Services, 이하 드미노)의 올리비아 드 파툴(Olivia de Patoul) 아시아-태평양 수석 법률 고문은 최근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기업의 ESG 준수와 관련한 투자자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이같이 강조했다.



기업의 잘못된 경영과 불법행위로 투자자들이 손해를 보고도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기업은 아무런 개선 없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고 주가 하락 리스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ESG 준수하지 않으면 수천억 피해보상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ESG의 중요성은 갈수록 강조되고 있지만, 정작 기업들이나 투자자들은 왜 기업이 ESG를 제대로 준수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ESG는 환경경영(Environmental Responsibility), 사회책임경영(Social Responsibility), 기업지배구조(Governance)의 영어 앞글자를 따온 것인데, 기업 실적이나 재무구조와는 상관없는 추상적인 개념들이 어떻게 기업가치에 영향을 미치는지 논리적 연결점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의 도덕적 잘못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잘못된 경영판단이나 회계부정으로 기업가치가 훼손되는 사례들이 발생하면 투자 측면에서 ESG를 제대로 준수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번에 깨닫게 된다.

ESG의 3가지 요소 중 기업가치에 보다 밀접하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G(지배구조)다. E(환경)나 S(사회)는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쉽지 않고 주가와의 연계성을 설명하기 어렵지만, 지배구조 리스크가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보다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배구조는 △주주의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는지 △경영진의 의사결정은 얼마나 투명하게 이뤄지는지 △경영진을 감시·감독하는 이사회의 구성이 독립적인고 전문적인지 △회계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감사기구의 독립성과 전문성은 어느 정도인지 등에 따라 달라진다. 지배구조 수준이 높은 기업일수록 경영진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낮고, 투명한 회계처리로 시장의 신뢰를 얻게 된다.

해외에서는 지배구조 리스크로 인한 기업가치 훼손이 발생할 경우 이를 바로잡는 투자자들의 소송이 활발히 이뤄진다. 기업은 지배구조 개선에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 주가 하락에 대해서는 손실을 보전받는 것이 투자자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영향이다.

드미노 리커버리 서비스의 올리비아 법률 고문. /사진제공=드미노드미노 리커버리 서비스의 올리비아 법률 고문. /사진제공=드미노


투자자 소송이 활발하게 진행되다 보니 이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도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드미노다. 드미노는 1991년 설립된 이래 홍콩, 뉴욕, 런던, 브뤼셀, 밀라노, 룩셈부르크 등 전세계 곳곳에 지사를 두고 투자자 이익을 보호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기업가치 훼손에 투자자들이 소송에 나서는 것은 단순히 손실을 복구한다는 차원보다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으로 투자 리스크를 줄이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드미노는 강조한다.

올리비아 고문은 "투자자 소송은 책임 투자를 보장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우리의 역할은 투자자들이 법적 조치로 경제적 손실을 복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기업)에게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표적 사례가 벨기에 금융회사 포티스(현 아게아)의 재무부실 은폐 사건이다. 포티스는 은행, 보험, 자산운용 사업 등을 영위하는 벨기에 최대 금융그룹인데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네덜란드 은행인 ABN암로를 120조원에 인수하면서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상황까지 갔다. 하지만 포티스는 구제 금융을 받기 직전까지 건전한 재무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며 투자자들을 속여왔다. 결국 2008년 10월 구제 금융 사실이 알려지면서 50유로를 웃돌던 주가는 10유로대로 급락했고 투자자들은 큰 피해를 봤다.

이에 투자자들은 소송에 나섰고, 수년간의 소송 끝에 아게아와 투자자들은 2017년 12월 13억유로(1조7500억원)의 보상안에 합의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제기된 투자자 소송 중 가장 큰 규모의 합의금이었다.

올림푸스 / 사진제공=뉴시스올림푸스 / 사진제공=뉴시스
일본 올림푸스의 회계조작으로 인한 투자자 손실도 대표적 사례다. 세계적인 카메라 기업 올림푸스는 1990년대부터 투자해 온 투자상품에서 발생한 대규모 손실을 감추기 위해 무려 20년 가까이 1350억엔(1조5000억원) 규모의 조직적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이 같은 사실은 2011년 올림푸스에 취임한 영국인 마이클 우드포드 사장에 의해 그해 10월 폭로됐고, 그 다음 달 올림푸스는 공시를 통해 분식회계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올림푸스 주가는 한 달 동안 2482엔에서 460엔으로 81% 폭락했다.

올림푸스 회계부정 사건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기업들의 폐쇄적이고 불투명한 기업 문화가 지배구조 리스크에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단편적 사례로 꼽힌다. 드미노는 이 사건에 대해 60여곳의 기관 투자자를 대신해 소송을 냈고, 2016년 12월 도쿄지방법원의 판결로 손실 금액의 45%를 복구할 수 있었다.

투자자 소송이 활발할 뿐 아니라 승소율도 높다. 드미노만 해도 지난 30여년 간 13개국에서 32건의 소송의 소송을 담당했는데, 승소나 합의 등 긍정적 결과를 도출한 사례가 81%고 평균 복구율은 41.4%를 기록했다. 막대한 손해배상을 물지 않으려면 기업도 스스로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리스크를 줄일 수밖에 없다.

투자자 소송, 국내선 유명무실…지배구조 개선 요원
동양피해자대책협의회 회원들이 2014년10월1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현재현 동양그룹 전회장의 1심 선고 공판 결과 관련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참가자들은 '동양그룹이 동양증권을 통해 조직적으로 금융사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오늘 공판으로 드러났다'며 '정부와 금융당국은 동양증권 부도사태 관련 혐의자들을 엄벌하라'고 주장했다.   현 전회장은 이날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1조3000억대 사기성 기업어음과 회사채를 발행한 혐의 등으로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2014.10.17/뉴스1동양피해자대책협의회 회원들이 2014년10월1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현재현 동양그룹 전회장의 1심 선고 공판 결과 관련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참가자들은 '동양그룹이 동양증권을 통해 조직적으로 금융사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오늘 공판으로 드러났다'며 '정부와 금융당국은 동양증권 부도사태 관련 혐의자들을 엄벌하라'고 주장했다. 현 전회장은 이날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1조3000억대 사기성 기업어음과 회사채를 발행한 혐의 등으로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2014.10.17/뉴스1
그러나 국내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요원한 과제다. 기업의 잘못으로 투자자가 피해를 입어도 이를 구제받을 방법이 마땅치 않고, 기업은 투자자 소송 리스크에서 자유(?)로우니 굳이 지배구조 개선에 신경쓸 일이 없는 것이다.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가 있지만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많다. 소송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실효성이 떨어져 실제 소송에 나서는 피해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증권집단소송제는 주가조작, 분식회계, 허위공시 등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소송에서 이기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도 같이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민사소송법 특례로 2005년 도입됐다.

하지만 제도 도입 이후 15년간 제기된 증권집단소송 건수는 10건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2017년 이후에는 단 한 건도 없는 상황이다. 집단소송을 제기하려면 이것이 소송의 대상이 되는지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 역시 3심이 적용되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본안 소송까지 합치면 사실상 6심제인 것이다.

국내 증권 관련 사고 중 피해규모 약 1조7000억원으로 가장 큰 일명 '동양그룹 사태'에 대한 집단소송도 2014년 처음 제기된 이후 6년이 지났지만 아직 본안 소송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증권집단소송 중 현재까지 판결이 나와 피해자가 구제받은 사례는 도이치은행의 주가연계증권(ELS) 시세조작과 씨모텍의 불법 유상증자 2건뿐이다.

척박한 투자자 소송 문화는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유인을 약화시키고 기업 가치를 떨어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올리비아 고문 역시 아시아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로 회계부정 우려를 꼽았다. 그는 "분식회계는 아시아 기업에서 나타나는 가장 흔한 문제"라며 "한국을 포함해 이와 관련한 문제가 있는 몇 가지 사례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이 최근 지배구조가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투자자들이 입은 부당한 피해에 대해서는 더 적극적으로 소송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올리비아 고문은 "한국 투자자들이 소송에 소극적이란 점을 알고 있다"며 "하지만 회사와 경영진은 규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위험을 알고 있어야 하고 이는 사기 행위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투자자 소송의 목표는 금융 시장의 건전성을 높이고 위법으로 인한 손실을 복구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며 "공정성, 훌륭한 지배구조, 투명성, 평등한 대우, 연대 등이 우리의 핵심 가치"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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