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중에 이런 호소를 듣는 경우가 몇 년 전부터 부쩍 늘어나고 있다. 40~50대의 전업주부들이 이런 호소를 하는 주요 계층. 남편이 돈을 못 벌어서 안 주는 게 아니고, 돈을 벌고 있는데도 자기 수입을 아내, 때로는 자녀들에게도 안 쓴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아내들은 자기 남편만 이기적이고 무능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혼을 고려할 정도로 부부 사이가 나쁘니 생활비를 안 주는 거 아니냐, 그 부부만의 문제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닌 듯 하다. 이런 호소가 갈수록 늘어가고, 생활비지급중단에 이르는 과정도 비슷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봐줘야 될 것 같다.
이런 의식은 가부장제의 산물인데, 가부장제가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니 남편들의 ‘가장의식’ 도 엷어지게 된다. 가장의식이 엷어지니 일방적 희생이 억울할 수밖에. 필자의 상담경험에 의하면 가부장제의 영향을 별로 안 받은 젊은 세대의 남편들은 혼자 생계를 책임진다는 의식 자체가 없다.
맞벌이는 기본이고 생활비는 당연히 분담한다고 생각하며, 내가 아내보다 가정경제에 쓰는 돈이 더 많으면 억울해한다. 이런 경향이 이제는 중년의 남편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는 걸로 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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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힘들게 돈 벌고 희생해야 하나. 나도 희생 그만 하고 나를 위해 살겠다’는 불평이 이제는 중년의 남편들에게도 자주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렇다. 한 마디로 중년 남성들의 가족부양거부 현상이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왜 중년남성들은 가족부양을 거부하게 될까. 생활비지급중단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남편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는지 이해가 간다. 50 전후의 남편들이 생활비를 끊게 되는 상황은 대체로 이렇게 전개된다.
경제적 부담 극대화되는 40대 중반~50대 초반이 최대 위기20대 중후반에 결혼해서 30세 즈음에 자녀를 낳기 시작한다. 결혼생활 시작은 맞벌이로 했어도 아이를 낳으면 육아를 위해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거나, 직장에 복귀해도 급여가 줄어드니 돈을 벌어오는 역할은 전적으로 혹은 주로 남편이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남편-돈/아내-살림의 구도를 15-20년 정도 유지하면 40대 중반~50대 초반이 되어 아이들이 중학생에서 대학생이 된다. 이들이 진학하면서부터 교육비가 급증하고, 아이들 성장에 따라 집을 늘려야 하니 주거비 부담도 확 늘어난다.
그 전까지도 10여년간 혼자 벌어서 가족들 먹여살리느라 힘들었는데, 이 시기가 되면 평균적인 직장인 급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생활비와 주거비가 올라가서 남편들의 부담감이 극에 달한다. 필요한 돈에 비해서 수입이 절대적으로 적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기가 부부의 생애주기에서 돈을 둘러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때인 것 같다.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아내가 맞벌이해서 도와주지 않는 한 다툼 없이 이 시기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사교육비에 대한 갈등이 심한데, 남편들은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사교육을 시키자고 하는데 아내들은 무리해서라도 비싼 사교육을 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본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벅찬 경제적 부담을 안고 끙끙대고 있는데, 정작 가족은 가장의 이런 노력을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녀들의 입시가 걸려있기 때문에 아내들의 관심은 주로 아이들에게 쏠려 있고, 남편은 아이들 교육의 보조자 정도로만 취급된다.
돈 벌어다줘야하는 남편, 집에선 오갈 데 없는 존재되기도‘밖에 나가 돈 벌어다주고 집에서는 아이들 공부를 방해하면 안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집 안의 공간배치도 아이들 위주이기 때문에 남편의 독립된 공간이 없는 경우가 많다. 만약 남편이 교육비와 집값을 감당 못하면 ‘무능하다’는 비난까지 받게 되니, 남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마음이 들 만 하다.
설상가상으로 직장에서는 서서히 퇴직을 고려해야 하는 나이가 되고, 임원승진경쟁에서 밀리게 되면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형편이 된다. 집과 직장 양쪽에서 이런 부담감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니 자연히 ‘왜 이 짐을 나만 져야하나’하는 불만이 고개를 들게 마련이다.
남편 불만 폭발하면, "너도 나가서 벌어 와"그 결과 40대 중후반이 되면 그 때까지는 묵묵히 가장 역할을 수행하던 남편들도 불평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전업주부인 아내에게 ‘나는 더 이상은 못 번다. 부족하면 네가 나가서 벌어라’고 화를 내고, ‘다른 여자들은 남는 시간에 재테크해서 재산을 불리는데 너는 집에서 뭐하고 놀고 있냐’면서 아내의 무능을 탓하기까지 한다.
남편들의 부양거부에 영향을 주는 또다른 요소가 평균수명의 연장이다. 예전에는 퇴직연령도 상대적으로 늦었고, 퇴직 후 생존기간이 길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보통 50대에 퇴직하고, 그후 30~40년의 여명이 남아있게 된다. 언제까지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는데 내 돈을 가족에게 다 써버리면 그 다음 나는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사이 나쁜 배우자와 이혼할 수도 있고 자식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 가족들에게 돈 쓰기가 아깝고 이혼 후를 대비해서 내가 쓸 돈을 모으고 싶어진다.
사교육비와 주거비 부담의 급증, 조기 퇴직으로 인한 수입단절가능성,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경제적 부담의 증가, 이런 요소들이 남편이 생활비를 끊었다는 중년부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한국의 중년남성들이 대부분 혼자서는 가족 전체가 쓰기에 충분할 만큼 벌지 못한다는 게 근본 원인이다.
3만달러 시대가 돼서 명목소득이 많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수준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갔다는 게 문제다. 자기 능력보다 더 무거운 짐을 안고 끙끙대다가 가족과의 심리적인 연결이 끊기면 어느 순간부터 가족한테 돈 쓰기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중년의 남편이 생활비를 끊은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면 그 다음 단계는 황혼이혼 혹은 졸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한 집에서 계속 살더라도 서로 말 안 하고 밥도 따로 해먹는 지경까지도 간다. 황혼이혼이나 졸혼을 하게 되면 기존의 재산을 반으로 나누니 생활수준이 당연히 하락한다. 특히, 집 한 채가 재산인데 팔아서 반씩 나누게 되면 아주 작은 집으로 옮기거나 집 소유를 포기해야 한다. 결국 노인빈곤층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런 결말을 감안하면 중년남성의 가족부양거부 현상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왜 중년 남성들이 가족부양을 거부하게 되는지를 다른 가족들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하고, 누가 돈을 벌고 어디에 얼마나 쓸 것인지에 대해서 부부 혹은 가족 전체가 허심탄회하게 의논하고 합의해야 한다. 어느 사회나 자원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가장 첨예하다. 가정도 하나의 사회이니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시길 바란다.
조혜정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