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가 모를 ‘부부의 세계’가 싱글들에게 미친 영향

윤가이(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0.05.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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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JTBC사진제공=JTBC


“결혼하니까 좋아? 연애할 때랑 어떻게 달라?”
“아이 낳고 나니 어때? 뭔가 달라진 게 있어?”

친한 지인들 중 기혼자가 있다면 이따금씩 던지는 질문입니다. 불혹의 나이가 됐지만 아직 싱글인 필자는 마치 한 번도 보지 못한 신화 속 유니콘 그리듯 ‘결혼’이 마냥 궁금할 따름이죠.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주위엔 간증해줄 기혼자들이 넘쳐나고, TV나 영화, 소설 속에서도 결혼이나 부부에 대해 다룬 이야기들을 숱하게 만나지만, 그런 식의 간접 경험은 그저 상상만을 부추길 뿐입니다. 괜스레 ‘내 결혼은 남들과 다를 거야!’ 같은 해괴한(?) 아집까지 생겨나고 말이죠. 이래서 이 노처녀 아직 시집을 못 가나 봅니다.

올해 단연코 최고의 화제작이 유력한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지난 16일 종영했습니다. 이 작품은 JTBC 창사 이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로 남았습니다. 최종회는 종전 최고 기록을 보유했던 ‘스카이 캐슬’(23.8%) 마저 제친 28.4%의 시청률을 올리며 비지상파 채널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습니다.(닐슨코리아 유료가구 전국기준)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를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국내 리메이크 작품들 중에서도 화제성과 만듦새가 조화로운, 드물게 명예로운 성과로 꽤나 오래 회자될 것 같습니다.



결말은 대체적으로 원작을 그대로 따랐는데, 그래서 시청자들 사이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리네 보편적인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거나, 비현실적이라 공감하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상당하네요. 물론 상대적으로 젊은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틀에 박힌 보수적인 편견들만 덜어내면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는 반응들도 나옵니다.

최종회에서 지선우(김희애)와 이태오(박해준) 부부는 결국 헤어져 각자의 일상을 살고, 부모의 지독한 사랑과 전쟁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아들 이준영(전준서)은 가출했다가 1년 만에 돌아오게 됐죠. 이태오의 불륜녀로 시작해 두 번째 부인이 됐다가 다시 싱글의 삶을 선택한 여다경(한소희) 역시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살아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19금 시청등급으로 방송을 시작한 ‘부부의 세계’는 7회부터 15세 시청등급으로 전파를 탔죠. 그런데 8회 지선우가 괴한에게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1인칭(가해자) 시점으로 펼쳐지면서 지나치게 가학적이라는 비판에 휩싸입니다. 이에 9회부터 다시 19금으로 등급을 조정해 끝날 때까지 작가나 연출자의 본래 의도를 최대한 살리면서 성인남녀, 특히 많은 부부 시청자들에게 쫄깃한 긴장감과 리얼리티를 선사했습니다.



사진제공=JTBC사진제공=JTBC
아무래도 방송 초반부터 선정적이라거나 막장이라는 등 회의적인 감상들도 쏟아졌는데요. 당장 환갑 줄인 필자의 모친은 ‘말도 안 돼 도무지 볼 수가 없다’며 일찌감치 채널을 돌렸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장년, 노년층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영국 원작을 따르는 스토리 라인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졌을 듯 보입니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선우도 다경이도 둘 다 사랑한다’며 자신의 불륜을 합리화 또는 미화시키는 이태오를 두 눈 뜨고 봐줄 순 없던 거죠. 실제로 각종 SNS와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배신당한 지선우가 이태오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라이벌 친구인 손제혁(김영민)과 하룻밤을 보내는 행동, 엔딩에서 부부 모두 집 나간 아들을 1년이나 찾지 못한 채 그저 기다리면서 일상을 살고 있는 모습 등은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랄까요, 그러니까 ‘불륜은 부부를 넘어 한 가정과 그 주변까지 망하게 만드는 폭탄, 절대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매우 주효한 드라마였다고 생각됩니다. 원작과 리메이크작 사이 국가, 문화적 차이로 인한 공감대 결여는 어느 정도 눈감아주고, 메시지 그 자체에 집중한다면 이번 ‘부부의 세계’를 통해 불륜이 얼마나 해롭고 파괴적인 행위인지 마치 직접 경험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기 때문이죠. 드라마를 보면서부터는 결혼도 불륜도 가보지 않아 모르는 길이 아니라, 마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인 듯 분노가 치밀고 눈물이 터졌던 겁니다.


감정의 미세한 농도 차, 세밀한 심리 변화를 탁월하게 연기해준 김희애 박해준 한소희 김영민 박선영(고예림 역) 등 배우들 덕도 아주 크네요. 속 터져가며 매일매일 실제로 그 인생을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내공 쟁쟁한 배우들의 연기력 때문에 매회가 스펙터클했습니다.

얼마 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요즘 부부 사이에 서로 휴대폰을 검사하거나 통금 시간을 정해 단속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이게 다 그 망할 ‘부부의 세계’ 때문이야! 와이프가 어찌나 쪼아대는지 스트레스야!”라고 푸념하며 서둘러 뜨는 유부남 덕에 웃기도 했죠.



‘부부의 세계’라... 사랑과 결혼, 부부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우린 대체 언제까지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까요? 드라마 속 지선우와 이태오처럼, 사랑인지 애증인지 미련인지 연민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그 관계를 과연 어떻게 맺고 지속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결알못’(결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긴 하나 이제 하나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불륜은 미친 짓’이란 진리 말입니다. 지선우 이태오 부부의 파국 가운데 가장 불쌍한 건 아들 이준영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자신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입을 맞추는 엄마 아빠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건강한 가정의 마스코트라는 자부심도 있었을 텐데, 그 어린 소년이 불륜녀와 격렬하게 키스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목도하고 받았을 충격. 정신 나가버린 엄마의 위태로운 행보를 함께한 과정, 결국엔 아빠의 두 번째 가족에게 다가갔지만 버림받았던 고통....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부모의 전쟁 속에 마치 고아처럼 내몰린 이준영의 심정이라니... 헤아리기조차 어렵습니다.

에잇! ‘부부의 세계’를 만나고 나니, 이생에 결혼은 정말 더 어렵게 되고 말았네요.



윤가이(칼럼니스트, 마이컴퍼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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