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펄떡이던 심장이 잔잔해졌다고요?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20.05.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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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박미산 시인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

[시인의 집]펄떡이던 심장이 잔잔해졌다고요?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미산(1954~ )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는 사람과 풍경, 그림자로 산 세월에 안부를 묻고 있다. 여기 산(山)이 있고, 물에 비친 산(渼)이 있다. 산은 그대로 우뚝하고, 물에 비친 산은 물결무늬로 일렁인다. 보기에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물속에 거꾸로 처박힌 산은 고요히 힘겹다. 바람이 불어야 겨우 힘듦을 밖으로 표시한다.

시인의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이하 ‘시인의 말’)다. “지금 이곳”에 “있으면서도 없”는 그들은 누구일까. 이번 시집에는 소설가 최정희와 선생의 두 딸 채원·지원 작가, 그리고 “당신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이상이 백석이 김동환이 나타”(‘중중무진重重無盡’)난다. 시 ‘모란, 동백 화실’에는 이제하(시인 겸 소설가), 조문진(영화감독), 김문수(소설가) 등이 등장한다. 다들 그대로 높은 산이다.



시 ‘해인초’에는 “나랑 앞치마를 두르고 조문객을 맞”고, 설거지하는 오정희 작가도 나온다. 문상을 온 “J평론가와 K평론가”는 “그녀가 갖다 주는 맥주를 마시며 이 집 파출부들은 ‘지적이네’”라고 농담까지 한다. 이 모든 풍경이 부럽고 멋있을지 모르지만, 물속에서 산 그림자로 일렁인 시인의 삶은 “차갑고 시린 시간”(‘꼬르동 블루’)이었을 것이다.

결혼 이전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부둣가에서 하역하던 젊은 아버지, 복미식당 주방장이었던 엄마, 구두통을 멘 어린 오빠, 이북을 몇 차례나 들락거린 사촌오빠 등 가난하면서도 가슴 아픈 가족사를 애잔하게 그려낸다. 또한 흑산도 바다다방 양양, 염전 섬 노예로 산 김씨, 새터민 장씨 등과 같은 소외된 사람들은 물론 늦은 나이에 한글을 깨치고 시를 쓴 사람들의 삶을 잔잔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밖에도 ‘~에게’라는 부제를 통해 인왕선사·은희·우 작가와 이니셜로 처리한 M·L 등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추천사를 쓴 신달자 시인은 “사람의 이야기가 살아 움직”인다고 했다. 나 자신도 힘든 상황이지만 시인은 이들의 삶을 외면하거나 내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 안음으로써 더욱 깊은 사유와 통찰의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경복궁 지나
금천시장을 건너오면
흰 당나귀를 만날 거예요, 당신은
꽃피지 않는 바깥세상일랑 잠시 접어두고
몽글몽글 피어나는 벚꽃을 바라보아요
뜨거운 국수를 먹는 동안
흰 꽃들은 서둘러 떠나고
밀려드는 눈송이가
창문을 두드려요
펄떡이던 심장이 잔잔해졌다고요?
흰 당나귀를 보내드릴게요
혹한의 겨울을 무사히 지낸
푸릇푸릇했던 당신의 옛이야기를
타박타박 싣고 올 거예요
흰 당나귀가 길을 잃었다고요?
바람의 말과
수성동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오세요
불빛에 흔들리는 마가리가 보일 겁니다
우리 잠시, 흰 당나귀가
아주까리기름 쪼는 소리로
느릿느릿 읽어주는 시를 들어보자고요

-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 전문



여는 시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에는 ‘백석 시 풍으로’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먼저 읽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백석은 생각한다.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면 사랑하는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고.

‘재북 시인 백석의 동화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은 시인은 지금 누하동 260번지 2층 카페 ‘백석, 흰 당나귀’에 앉아 있다. 카페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고/ 창문 너머 더 큰 벚나무”(‘누하동 260’)가 서 있다. 삶터인 이곳에서 시인은 ‘올 수 없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시를 쓴다.

백석은 ‘올 수 없는 사람’이지만 시인에게 백석은 “아니 올 리 없”는 사람이다. 백석이 나타샤에서 ‘고조곤히’ 와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백석은 “느릿느릿 읽어주는 시”처럼 온다. 시인은 어느새 나타샤가 되고, 카페 ‘백석, 흰 당나귀’는 ‘마가리’가 된다. 시를 쓰면서 백석과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이다. 겨울 카페의 밤이 깊어간다. 그렇게 시 한 편이 완성된다.

인천 창영국민학교 앞

손을 꼭 잡은 남매

여자아이는 교문 안으로 들어가고

오빠는 구두통을 메고 세상 안으로 돌아간다

흙먼지 뒤집어쓴 구두를

지전으로 바꾸면서

세상을 닦아냈다, 오빠는

까맣게 터진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뜨겁게 잡고

말을 잇지 못해

시인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오빠의 잃어버린 말을 찾아 세상 안으로 돌아간다

- ‘시인’ 전문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인천시 남구 도화동에 살던 시절 “아버지는 정치판을 맴돌았다”며, “엄마가 8남매를 먹여 살리려 뜨개질에 남의 밭 가꿔주며 살았다”고 고백했다. “두 살 위인 작은 오빠는 ‘너 공부 잘하니 내 몫까지 공부해라’며 구두닦이”가 되었다. “흙먼지 뒤집어쓴 구두”를 닦느라 “까맣게 터진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뜨겁게 잡고// 말을 잇지 못”하던 오빠 때문에 “시인이 되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모래알이 부서져 내려 기울어”(‘시인의 말’)진 세상을 견딘 아픈 가족사다.

박미산 시인은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고,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한 후 비로소 ‘산그림자’가 아닌 ‘산’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시 ‘꽃들의 발소리’에서 보듯, 이는 “몇 천 년 만에 비가 내”린 것처럼 기적 같은 일이다. “아무도 살 수 없는 불모의 땅” 같던 “내 생애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인은 각오를 다진다. “뜨겁게 달궈진 시가 훗날 발굴될 수 있”도록 “내일 또 내일을 걸어야겠다”고. 이제 시인의 자리는 무르고 싶어도 “무를 수 없는 씨앗처處”(‘두꺼비집’)가 되었다. “사람향기가 살아나는 방, 서촌”(‘사람향기를 맡고 싶소’), “꿈을 꿀 수 있는 그곳”(이하 ‘누하동 260’)에서 그렇게 “열에 들뜬 당신의 또 다른 기적”이 시작되고 있다.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박미산 지음. 채문사 펴냄. 124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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