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이하 ‘시인의 말’)다. “지금 이곳”에 “있으면서도 없”는 그들은 누구일까. 이번 시집에는 소설가 최정희와 선생의 두 딸 채원·지원 작가, 그리고 “당신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이상이 백석이 김동환이 나타”(‘중중무진重重無盡’)난다. 시 ‘모란, 동백 화실’에는 이제하(시인 겸 소설가), 조문진(영화감독), 김문수(소설가) 등이 등장한다. 다들 그대로 높은 산이다.
결혼 이전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부둣가에서 하역하던 젊은 아버지, 복미식당 주방장이었던 엄마, 구두통을 멘 어린 오빠, 이북을 몇 차례나 들락거린 사촌오빠 등 가난하면서도 가슴 아픈 가족사를 애잔하게 그려낸다. 또한 흑산도 바다다방 양양, 염전 섬 노예로 산 김씨, 새터민 장씨 등과 같은 소외된 사람들은 물론 늦은 나이에 한글을 깨치고 시를 쓴 사람들의 삶을 잔잔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밖에도 ‘~에게’라는 부제를 통해 인왕선사·은희·우 작가와 이니셜로 처리한 M·L 등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경복궁 지나
금천시장을 건너오면
흰 당나귀를 만날 거예요, 당신은
꽃피지 않는 바깥세상일랑 잠시 접어두고
몽글몽글 피어나는 벚꽃을 바라보아요
뜨거운 국수를 먹는 동안
흰 꽃들은 서둘러 떠나고
밀려드는 눈송이가
창문을 두드려요
펄떡이던 심장이 잔잔해졌다고요?
흰 당나귀를 보내드릴게요
혹한의 겨울을 무사히 지낸
푸릇푸릇했던 당신의 옛이야기를
타박타박 싣고 올 거예요
흰 당나귀가 길을 잃었다고요?
바람의 말과
수성동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오세요
불빛에 흔들리는 마가리가 보일 겁니다
우리 잠시, 흰 당나귀가
아주까리기름 쪼는 소리로
느릿느릿 읽어주는 시를 들어보자고요
-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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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시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에는 ‘백석 시 풍으로’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먼저 읽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백석은 생각한다.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면 사랑하는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고.
‘재북 시인 백석의 동화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은 시인은 지금 누하동 260번지 2층 카페 ‘백석, 흰 당나귀’에 앉아 있다. 카페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고/ 창문 너머 더 큰 벚나무”(‘누하동 260’)가 서 있다. 삶터인 이곳에서 시인은 ‘올 수 없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시를 쓴다.
백석은 ‘올 수 없는 사람’이지만 시인에게 백석은 “아니 올 리 없”는 사람이다. 백석이 나타샤에서 ‘고조곤히’ 와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백석은 “느릿느릿 읽어주는 시”처럼 온다. 시인은 어느새 나타샤가 되고, 카페 ‘백석, 흰 당나귀’는 ‘마가리’가 된다. 시를 쓰면서 백석과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이다. 겨울 카페의 밤이 깊어간다. 그렇게 시 한 편이 완성된다.
인천 창영국민학교 앞
손을 꼭 잡은 남매
여자아이는 교문 안으로 들어가고
오빠는 구두통을 메고 세상 안으로 돌아간다
흙먼지 뒤집어쓴 구두를
지전으로 바꾸면서
세상을 닦아냈다, 오빠는
까맣게 터진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뜨겁게 잡고
말을 잇지 못해
시인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오빠의 잃어버린 말을 찾아 세상 안으로 돌아간다
- ‘시인’ 전문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인천시 남구 도화동에 살던 시절 “아버지는 정치판을 맴돌았다”며, “엄마가 8남매를 먹여 살리려 뜨개질에 남의 밭 가꿔주며 살았다”고 고백했다. “두 살 위인 작은 오빠는 ‘너 공부 잘하니 내 몫까지 공부해라’며 구두닦이”가 되었다. “흙먼지 뒤집어쓴 구두”를 닦느라 “까맣게 터진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뜨겁게 잡고// 말을 잇지 못”하던 오빠 때문에 “시인이 되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모래알이 부서져 내려 기울어”(‘시인의 말’)진 세상을 견딘 아픈 가족사다.
박미산 시인은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고,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한 후 비로소 ‘산그림자’가 아닌 ‘산’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시 ‘꽃들의 발소리’에서 보듯, 이는 “몇 천 년 만에 비가 내”린 것처럼 기적 같은 일이다. “아무도 살 수 없는 불모의 땅” 같던 “내 생애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인은 각오를 다진다. “뜨겁게 달궈진 시가 훗날 발굴될 수 있”도록 “내일 또 내일을 걸어야겠다”고. 이제 시인의 자리는 무르고 싶어도 “무를 수 없는 씨앗처處”(‘두꺼비집’)가 되었다. “사람향기가 살아나는 방, 서촌”(‘사람향기를 맡고 싶소’), “꿈을 꿀 수 있는 그곳”(이하 ‘누하동 260’)에서 그렇게 “열에 들뜬 당신의 또 다른 기적”이 시작되고 있다.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박미산 지음. 채문사 펴냄. 124쪽/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