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은 오너경영 실적이 더 좋은데…" 삼성 걱정하는 사람들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박소연 기자, 이정혁 기자 2020.05.0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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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자 사과문에 담은 이재용의 진심…'삼성 독립경영' 선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경영권 승계와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김휘선 기자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경영권 승계와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김휘선 기자


"삼성 내부에서 누구도 물어볼 수 없던 질문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스스로 답했습니다. 전문경영인이 이끄는 집단지배체제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7일 복수의 삼성그룹 관계자들이 전날 이 부회장의 대국민사과에 대해 내놓은 해석이다. 이 부회장이 발표 직전까지 직접 다듬은 1847자짜리 사과문은 3대에 걸쳐 82년 동안 이어진 삼성그룹의 경영체제를 송두리째 바꾸는 선언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동안 재계 안팎에서는 삼성그룹의 오너 경영체제가 창업 3세인 이 부회장으로 끝날 것이라는 관측은 거의 없었다. 이 부회장이 오래 전부터 자녀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뜻을 주변 지인들에게 수차례 언급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이를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그룹이 이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세 자녀를 중심으로 계열 분리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도 이 부회장의 메시지로 뒤집혔다는 분석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오너 일가는 대주주로 책임 있는 역할을 하고 경영은 실력 있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방식이 이 부회장의 밑그림"이라고 전했다. 삼성전자가 2018년에 이사회 중심 경영을 선언하며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한 데 이어 올 초에는 이사회 의장에 처음으로 외부 인사(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를 선임한 것도 이 부회장의 이런 구상과 맞닿아 있다는 설명이다.

이 부회장의 구상을 두고 재계에서는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방식을 거론되는 목소리가 적잖다. 발렌베리 가문은 1856년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SEB)을 창업한 이래 160년간 5대째 '가족경영'을 유지하고 있다. 가족경영을 기반으로 하지만 계열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일임하고 독립경영을 보장한다.

지주사인 인베스터가 그룹을 지배하고 인베스터는 발렌베리 가문이 세운 재단이 소유하는 구조다. 삼성그룹과 발렌베리 가문은 2000년대 초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때부터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12월 방한한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과 직접 만나 신사업 협력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이런 속내를 밝힌 것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시장 경쟁에서 삼성그룹이 살아남으려면 전문성과 통찰력을 갖춘 최고 수준의 책임 경영이 필수라는 절박감 때문으로 읽힌다. 기업인 이재용의 고민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이 부회장 스스로 경영권 승계 논란을 겪고 있듯 앞으로 4세 승계가 현실적으로 걸림돌이 만만치 않다는 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는 불완전한 편이다.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이 부회장의 직접 보유지분은 0.7%에 그친다. 이밖에 이 부회장의 지분은 삼성물산 17.08%, 삼성SDS 9.2%, 삼성생명 0.09%다. 최대 60%까지 내야 하는 상속세법으로 세대가 내려갈수록 오너 일가의 개인 지분율은 희석될 수밖에 없다.

오너가 있는 10대 그룹 가운데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삼성그룹이 처음이다. SK그룹이 과거 후계 승계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한 적이 있지만 자녀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하지는 않았다. 지난해 이웅열 회장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를 발표한 코오롱그룹에서도 자녀 승계를 하지 않겠다는 발표는 없었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의 '실험'을 두고 우려도 나온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내 여건은 법제도 미비로 스웨덴 발렌베리식의 기업 지배가 불가능한데 전문경영체제로 가는 것이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재계 한 인사는 "삼성전자가 초일류기업이 된 바탕에는 7년 동안의 적자를 버틴 오너십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며 "단기성과에 집중하기 쉬운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삼성 특유의 강점과 역동성을 어떻게 지켜나갈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심재현 기자

뉴삼성 포문 열었지만…"'애니콜 15만대 화형식'은 이제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무노조 경영'을 종식하고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데 대해 재계는 '뉴삼성'으로 거듭나기 위해 파격적인 용단을 내린 것으로 평가했다.

글로벌 기업으로서 준법경영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란 진단과 함께 '오너 책임경영'과 '무노조 경영'이란 삼성의 경영 원칙이 철회된 데 대해 일각에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7일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삼성이 내놓을 수 있는 건 다 내놓은 것 아니냐. 이재용 부회장 스스로가 물러난다는 얘기 빼고 다 했다"며 "그간 국민의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했던 걸 반성하고 쇄신안을 내놓은 것이니 일단 따뜻한 시선으로 봐줘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전자 출신인 박재근 한양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장)는 "반도체가 글로벌 비즈니스인데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요구하는 윤리적 요건을 갖추려 노력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며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겠단 것은 전문 경영인으로서 전문성으로 평가받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는 "준법경영 의지를 밝힌 것은 사회적으로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4세 승계 불가"는 이 부회장 고민 단적으로 보여줘

이 부회장이 오너경영 체제를 4세까지 이어가지 않겠다고 밝힌 데 대해서는 다소 의외라는 반응과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또 다른 경제단체 관계자는 "삼성이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였다"며 "선택지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중대한 내용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이 전문경영인 체제에선 불가능한 도전을 통해 일궈낸 반도체 신화, '애니콜 화형식'으로 알려진 가정용 무선전화기 15만대 화형식(실제는 휴대폰 애니콜이 아니라 가정용 무선전화기) 같은 과감한 장면을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오너 경영이 전문인 경영보다 효율 떨어지나" 논란거리

오너 경영이나 무노조 경영이 무조건 나쁜 것이냐는 반론도 있다. 오너 경영과 전문인 경영 중 과연 무엇이 낫느냐는 경제학계에서도 오래된 논란거리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을 이끈 원동력을 단순히 오너 경영과 무노조 경영이라고 보는데 아직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원칙을 폐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기업은 경영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자치권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세태는 안타깝다"고 밝혔다.

고개숙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고개숙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 부회장이 사과한 일부 내용은 기업가를 중시하지 않는 한국 현실이 반영됐다는 지적도 있다.

이경묵 교수는 "이런 사과까지 해야 하는 한국의 법과 제도가 안타깝다"며 "높은 상속세율로 기업이 승계 때마다 부담이 막대해 법개정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 "한국과 일본의 경우엔 오너 경영보다 전문경영인의 실적이 더 낮다"며 "미국의 경우 전문경영인이 10년, 20년도 막강한 권력을 갖고 기업을 끌고 가지만 한국에선 이런 경영은 어렵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에선 한국은 법 제도 미비로 스웨덴의 발렌베리식 기업 지배가 불가능한데 무턱대고 기업에게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비판도 들린다.

◆무노조 경영, "성숙한 노동운동 준비됐나" 비판도

무노조 경영이 자칫 기업의 혁신과 발전을 저해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강점으로 평가받은 이유는 한국의 노조가 그만큼 정상적인 노동활동을 벗어나 지나치게 요구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라며 "삼성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걸맞는 성숙한 노동운동이 뒷받침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박재근 교수는 "반도체는 대부분 생산라인이 완전 자동화돼 노조가 생산에 큰 영향은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무노조 폐기는 시대적 흐름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소연 기자

삼성준법감시위, '이재용 부회장 사과' 수용했다…구체적 '로드맵' 요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이재용 삼성전자 (76,300원 ▼2,300 -2.93%)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를 수용하며 앞으로 '준법 경영 이행 로드맵' 마련을 요구했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이하 준법감시위)는 7일 서울 서초구 삼성 서초사옥에서 정기회의를 열고 "이 부회장의 답변 발표가 직접 이뤄지고, 준법의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점에 대해 의미 있게 평가한다"며 사실상 사과문 수용 입장을 밝혔다. 이는 삼성의 견제·감시기구인 준법감시위가 이 부회장의 전날 사과를 진정성 있게 평가한다는 의미다.

이날 준법감시위 회의는 1부와 2부로 나눠 열릴 정도로 이 부회장 사과에 대해 심층 논의를 이어갔다. 준법감시위는 이 부회장의 사과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지속 가능한 경영 체계 수립 △노동3권의 실효성 있는 보장 △시민사회의 실질적 신뢰회복을 위한 실천방안을 요청했다.

준법감시위의 이런 요청들은 전날 이 부회장이 공식적으로 약속한 내용들이어서 앞으로 무난하게 후속 방안이 마련될 전망이다. 전날 이 부회장은 "삼성이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법과 윤리를 엄격하게 준수하지 못해 국민께 실망과 심려를 끼쳤다"며 반성했다. 특히 '승계문제'와 '무노조 경영'에 대해 거듭 사과하고 재판 이후에도 준법감시위 활동을 보장했다.

준법감시위는 이 부회장 사과를 계기로 삼성 주요 계열사 사장단 및 이사회와 조만간 연쇄 회동을 가질 전망이다. 이 자리에서 준법감시위는 계열사 실정에 맞게 구체적인 '준법 이행 로드맵'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삼성과 다양한 시민사회 단체가 함께 하는 간담회도 열릴 가능성이 높다. 일부 시민사회 단체는 유독 삼성의 행보에 비난 위주로 일관했는데 준법감시위 일부 위원이 시민단체와의 간담회를 주선해 다양한 문제들을 함께 해결할 것으로 보인다.

또 준법감시위는 삼성 주요 계열사들의 준법경영 감시 작업에 이미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으로 삼성 7개 계열사의 대외 후원금과 내부 거래 문제 등을 따져볼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전날 이 부회장의 사과문 중 특히 ‘4세 승계 불허’가 불러올 전문경영인 체제의 효율성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뜨겁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과연 오너 경영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경영방식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이다.

서울대 이경묵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경우엔 오너 경영 실적이 전문경영인 실적보다 더 좋다”며 “미국의 경우 전문경영인이 10년, 20년 막강한 권력을 갖고 기업을 끌고 가지만 한국에선 이런 경영은 어렵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너 경영의 뚝심이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도 들린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전문경영인 체제에선 불가능한 도전을 해 성공한 사례는 많이 있다”며 “단적으로 반도체 신화나 애니콜 500만대 화형식 같은 과감한 장면은 다신 못 볼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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