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월 황교안, '보수 간판'의 광속 등장과 퇴장

머니투데이 김상준 기자 2020.04.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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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

4월15일, 보수 진영에서 '황교안 간판'이 철거됐다.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했다. 당에 들어온 지 15개월 만이다. 머니투데이 더300(the300)이 '황교안'을 돌아봤다.

2019년 2월 황교안 자유한국당 신임 당대표2019년 2월 황교안 자유한국당 신임 당대표


혜성처럼 등장한 보수의 '새 간판'
2018년 자유한국당(통합당 전신)은 6·13 지방선거에서 대패했다. 한국당이 차지한 의석은 광역자치단체장 17석 중 2석, 기초자치단체장 226석 중 53석에 그쳤다. 당대표였던 홍준표 전 대표는 이에 책임지고 사퇴했다.



이후 '김병준 비대위 체제'가 6개월 동안 지속됐다. 그러다 2019년 1월, 황 전 대표가 등장했다. 황 전 대표는 입당과 동시에 당대표에 나서겠다 선언했다. 박근혜 정부 법무부 장관를 지내고 탄핵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던 그는 단숨에 당내 지지를 확보했다.

'황교안 대세론'이 당을 지배한 가운데 치러진 당대표 경선에서 그는 약 50% 득표율로 당대표가 됐다. 입당 43일 만이다.



2019년 6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대한민국 청년들의 미래와 꿈'을 주제로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사진=뉴스12019년 6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대한민국 청년들의 미래와 꿈'을 주제로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사진=뉴스1
6개월 간의 '여론조사 차기 대선주자 1위' 단꿈
'뉴페이스'는 국민들에게 기대감을 줬다. 2019년 1월부터 6월까지 황 전 대표는 여론조사 차기 대선주자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신인 프리미엄'은 조금씩 벽으로 작용했다. 5·18 망언을 한 한국당 의원들에 대한 미적지근한 징계가 대표적이다. 그는 당대표로서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리더십 논란'이 시작됐다.


당 안팎에선 그의 커리어를 두고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공안검사 출신',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꼬리표가 점점 커졌다.

2019년 6월, 말실수가 터졌다. '대한민국 청년들의 미래와 꿈'이라는 주제로 숙명여대 강단에 선 그는 "내가 아는 한 청년은 3점도 안 되는 학점에 800점 정도 되는 토익으로 취업했다"며 "그게 바로 우리 아들"이라고 했다. 특혜 논란과 함께 현실을 모른다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다음 달인 7월, 황 전 대표는 결국 이낙연 전 국무총리에게 차기 대선주자 1위 자리를 내줬다. 이후 지난 15일 당대표직에서 사퇴하기 전까지 황 전 대표는 줄곧 2위에 머물렀다.

2019년 11월 단식 중인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2019년 11월 단식 중인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
투사 황교안, '아스팔트 지지층' 선택하고 '리더십 논란' 잠재워
9월 '조국 사태'가 터지자 한국당은 극렬히 반발했다. 의원들은 즉각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청문회에서도, 각 상임위에서도 조국 전 장관의 '비리'를 폭로하기 위해 애썼다. 민주당이 점차 수세에 몰리는 와중에 황 전 대표는 돌연 삭발을 택했다.



11월엔 8일 동안 단식도 했다. 민주당이 '4+1 연합체'를 구성해 공수처법과 준연동형비례대표제 통과를 밀어붙이면서다.

평가는 엇갈렸다. 절박함의 표현이라는 평가와 '정치력' 없이 도피만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치권에선 '뜬금없다'는 평가가 우세했다.

단식을 마친 황 전 대표는 국회 대신 광장을 택했다. 연일 장외집회를 열었다. 시간이 갈수록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 수위도 높아졌다. 그는 문 정부를 향해 '극좌세력', '도둑놈들'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을 썼다.



황 전 대표는 투사로 거듭났다. 단식을 통해 보수 지지층을 결집했다. 특히 '태극기 세력'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황 전 대표는 마침내 '아스팔트' 위에 섰다.

확실한 지지층이 생기자 '리더십 논란'도 불식됐다. 당내 '친황'이라는 계파가 부각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2020년 2월 미래통합당 출범/사진=뉴스12020년 2월 미래통합당 출범/사진=뉴스1


'탄핵의 강' 대충 건넌 황교안
총선을 3개월 앞둔 올해 1월엔 보수통합이 화두가 되면서 황 전 대표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메인 파트너 새로운보수당과의 통합이 핵심이었다.

유승민 전 새보수당 보수재건위원장은 황 전 대표에게 '탄핵의 강'을 건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 전 대표는 확실하게 탄핵의 강을 건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확실하게 입장을 얘기해달라'고 물어도 그는 "예전부터 이야기한 그대로"라는 애매한 답변을 내놨다.



유 전 위원장은 황 전 대표가 탄핵의 강을 건넌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더 늦어지면 총선을 준비할 수 없었다.

황 전 대표가 명시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 사과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외연 확장' 때문이었다. 당시 황 전 대표는 중도층 뿐만 아니라 태극기 세력까지 아우르는 '범보수 빅텐트'를 주장했다.

그로서는 탄핵을 인정하면 태극기 세력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중도층을 대거 잃는 판단이었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선거상황실에서 총선 결과 관련 사퇴 입장을 밝힌 후 인사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선거상황실에서 총선 결과 관련 사퇴 입장을 밝힌 후 인사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종로에 던져진 황교안…총선 참패에 빠른 '손절'
황 전 대표는 당대표였지만 '금배지'를 달아본 적이 없었다. 선거를 경험한 적도 없었다. 이번 총선 종로에 뛰어든 게 그의 생애 첫 출마였다.

시작이 안 좋았다. 황 전 대표는 종로 출마를 망설였다. 그가 망설이는 동안 여론은 악화됐다. '결단력이 없다', '겁을 먹은 것이냐'는 말이 나왔다.

당내서도 황 전 대표의 종로 출마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석연 전 통합당 공관위 부위원장은 대놓고 황 전 대표를 압박했다. 결국 그는 종로 출마 선언을 했다. 등 떠밀리듯 '정치 1번지'에 나섰다.



결과는 패배였다. 황 전 대표는 전국 유세를 포기하고 종로에만 집중했지만 결과는 대패였다. 상대 후보인 이낙연 전 총리에 득표율 18.4% 차이로 졌다.

황 전 대표는 빠른 '손절'에 나섰다. 종로 낙선이 확실시되고 당의 총선 참패가 점쳐지자 15일 당일 사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황 전 대표는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했지만 그의 사퇴로 통합당은 혼란에 빠졌다. 사실상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 20대 통합당 의원들이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황 전 대표는 그러나 "일선에서 물러나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저의 역할이 뭔지 성찰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총선 패배로 입은 상처가 언제쯤 아물지, 또 패배의 아픔를 딛고 언제쯤 등장할진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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