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는 추락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하지 않았던 2월 중순만 해도 13만원대였던 현대차 주가는 한 달 만인 3월 중순에 6만5000원대까지 급전 직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이후 11년 만에 최저치다. 연초 25만원대였던 현대모비스 주가도 3월 중순에 12만원대까지 추락했다. 마찬가지로 2009년 주가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3월 넷째주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수백억원 어치의 자사주를 매입하면서 반전을 가져왔다. 정 수석부회장은 3월 23일부터 27일까지 5일 연속으로 총 406억원과 411억원을 들여 각각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식을 사들였다. 정 수석부회장이 일주일간 자사주 매입에 쓴 돈은 총 822억원이었다.
11년 전 주가 수준까지 추락했던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가는 정 수석부회장이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시작한 3월 23일 이후 하락을 멈추고 반등하기 시작했고 10일 현재 3월 23일 종가 대비 44.7%, 35.6% 반등했다. 정 수석부회장이 추락하던 주가를 되살린 셈이다.
회사 최고경영진의 자사주 매입은 외부인에게 종종 긍정적인 신호를 전달한다. 재무학에서는 이를 신호이론(signaling theory)이라고 부른다. 코로나19 사태로 외부자들은 현대차그룹이 얼마나 피해를 입을지 잘 알지 못한다.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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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외부자들은 현대차그룹의 미래 실적에 크나큰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이때 임원 등 내부자가 자사주를 대량 매입하는 행위는 외부자에게 기업의 실적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정 수석부회장의 수백억원 자사주 매입은 전문경영인의 자사주 매입과는 다른 차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바로 그룹 오너로서의 책임경영 의지다.
이들 전문경영인의 자사주 매입은 순수한 신호이론 성격이 짙다. 코로나19 사태로 기업의 미래가치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갖고 있는 외부자들을 안심시키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오너인 정 수석부회장의 수백억원 자사주 매입은 외부자들에게 주가를 부양하겠다는 강력한 실천의지가 추가로 내포돼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의 오너가 수백억원 자사주 매입에 직접 나서는 경우는 흔치 않다. 2018년 9월 40대 ‘젊은’ 구광모 회장이 LG그룹 회장으로 새로 취임한 이래 LG그룹 내 임원들이 역대 최대 규모의 자사주 매입에 나섰지만 정작 구 회장의 자사주 매입은 한 번도 없었다. 올해 코로나19 사태로 LG그룹 주가가 크게 하락했지만 구 회장은 자사주 매입에 나서지 않았다.
삼성그룹에서도 이재용 부회장이 자사주 매입에 직접 나선 적이 없다. 지난해 5월 상반기 반도체 업황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대세를 이루면서 삼성전자 주가가 연일 하락세를 면치 못했던 시기에 회사 임원들이 대거 자사주 매입에 나섰을 때도 이 부회장은 참여하지 않았고, 올해 코로나19 사태에도 이 부회장의 자사주 매입은 없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올해 현대차그룹의 정 수석부회장의 수백억원 자사주 매입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키팅 선생님은 대학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참교육을 가르치려 했지만 교장에게 들통이 나면서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게 됐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떠나는 키팅 선생님을 향해 존경의 마음을 담아 “오 캡틴, 나의 캡틴!”을 외친다.
제자들이 외친 ‘오 캡팀, 나의 캡틴!‘은 원래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 제목으로 미국 16대 대통령인 링컨이 암살 당한 후에 그의 죽음을 기리는 추도시다. 키팅 선생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교실에는 휘트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휘트먼 시에서 캡틴은 링컨 대통령이고 함선은 미국이다. 선장인 링컨 대통령은 흑인 노예제도를 폐기하고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미국을 구했지만 자신은 암살을 당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참교육을 실천하며 제자들의 눈을 뜨게 했지만 정작 자신은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링컨 대통령과 키팅 선생님 모두 대의적으로 큰 성과를 거뒀지만 자신이 감내해야할 대가는 너무나 컸다.
그래서 시인 휘트먼은 암살당한 링컨 대통령을 칭송했고, 제자들은 떠나는 키팅 선생님을 향해 ’오 캡틴, 나의 캡틴!‘을 외치며 존경을 표시한 것이다.
코로나19 여파로 현대차그룹이 위기에 봉착하자 정 수석부회장은 자신의 돈 수백억원을 들여 자사주를 매입했다. 그냥 1억~2억원이 아니라 무려 822억원이다. 만약 1억~2억원을 매입했다면 진정성이 없다고 여겼을 텐데, 822억원은 얘기가 다르다. 게다가 정 수석부회장이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해서 주가가 반등하리란 보장도 없다. 정 수석부회장이 자사주를 대량 매입한 기간에도 외국인은 줄곧 매도 우위를 보이며 -1472억원 순매도를 이어갔다. 정 수석부회장은 주가 하락으로 인한 대규모 손실 위험을 무릅쓰고 822억원을 투입하면서 책임경영을 행동으로 보였다.
다행히도 정 수석부회장은 10일 종가 기준으로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자사주 매입에서 42.9%, 33.8%의 평가차익을 보고 있다. 여타 임원들도 거의 대부분 높은 평가차익을 보고 있다. 만약 개미들이 정 수석부회장을 따라 두 회사 주식을 샀다면 최대 50%가 넘는 평가차익을 누릴 수 있다.
아직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지 않았고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가도 연초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1년 전 수준까지 추락했던 주가를 되살린 정 수석부회장의 대규모 자사주 매입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룹 오너로서의 책임경영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 행위였다. 투자자들이 정 수석부회장을 향해 ’오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