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에 다시 호출되는 '페스트'

박병성(공연 평론가) ize 기자 2020.04.0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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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국립극단 사진제공=국립극단


너무나 평범해서 심심할 정도도 덤덤한 도시. 갑작스럽게 퍼지는 병에 시민들은 혼란에 빠진다. 무능한 정치가는 실상을 축소하기에 급급하다가,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되자 도시를 폐쇄한다. 갑작스런 재앙에 도시를 벗어나려는 사람, 두려움에 떠는 사람, 재앙의 원인을 정하고 혐오를 퍼붓는 사람, 이런 와중에도 사익을 채우는 사람. 다양한 군상들이 혼란을 가중시킨다. 이 도시는 전 세계가 코로나 19 사태에 접어든 지구 어딘가에는 있을 법한 곳이지만,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오랑시를 묘사한 것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카뮈의 '페스트'가 다시 주목받는다. 모든 공연을 잠정 중단 내지 취소하고 있는 국립극단은 온라인을 통해 지난 공연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국립극단이 온라인 무료 서비스로 선보인 첫 작품이 박근형 연출의 '페스트'(2018년)다. 박근형의 연극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대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장벽이다. 페스트가 퍼지면서 고립된 도시의 이미지를 강조한 무대는 증오와 혐오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은유였다. 박근형의 연극은 페스트라는 불가항력적인 재앙에 인간들의 반응을 통해 전염병 자체보다 편견과 증오가 더 무서운 페스트였음을 느끼게 했다.

'페스트'는 2016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뮤지컬 넘버로 한 주크박스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뮤지컬은 2028년 국가 시스템에 의해 통제 당하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라고 여겼던 세상이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시스템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자를 절대 악으로 설정한 멜로드라마적인 구조를 취했다. 작품의 창작진들은 서태지 음악의 저항과 연대의 메시지가 카뮈의 작품과 닿는 부분이 있어 '페스트'를 선택했다고 한다. 뮤지컬 '페스트'는 페스트로 인해 이기적이고 혼란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죽음 앞에서도 희생하고 연대하는 인간의 고귀함을 강조한다.



사진제공=국립극단 사진제공=국립극단
코로나19 사태를 맞으면서 '페스트'의 장면들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마스크를 사재기하는 상인, 아무도 없는 섬으로 떠나는 갑부,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도 사지로 달려간 의료인들. 다시 든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 속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페스트'가 연극과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시대를 넘나들며 재탄생하는 것은 작품이 지니는 보편적인 울림 때문이다. 편견과 집단 혐오를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질병으로 본 박근형의 연극처럼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재앙은 언제든 '페스트' 속 군상들을 호출한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연 재해뿐만 아니라 팬데믹급 사회적인 재앙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것이다. '페스트'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배경으로 끊임없이 재탄생될 수 있는 이유이다.

소설 '페스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페스트 균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페스트가 쥐를 다시 깨우고, 그 쥐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로 보내 죽게 할 날이 오리라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다.”(유호식 역, 문학동네) 뮤지컬 '페스트'는 원작 중 어려움에 맞서고 희생을 감내하는 선의의 연대를 강조한다. '페스트'는 언제 되살아날지 모르는 인간들의 탐욕과 증오, 이기심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보다 조금 더 강력한 선한 영향력과 연대를 증명한다.


코로나19로 공연계는 공연이 대부분 취소되고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해졌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철칙이 무너지고 공연장 문을 걸어 잠갔다. 공연인들은 ‘Show Must Go On-line’으로 공연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런던 국립극장이나 앤드류 로이드 웨버, 로열 셰익스피어극단, 글로브 시어터 등 해외에서 지난 공연을 유투브를 통해 오픈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국립극단, 남산예술극장, 서울예술단 등 공공극장을 중심으로 온라인으로 공연 영상을 제공한다. 공연의 암흑기지만 조금만 열심히 움직이면 유명 작품의 방구석 1열을 경험할 수 있다. 아날로그적이고 대면 접촉을 기본으로 하는 공연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다. 비록 공연장은 폐쇄되었지만, 공연계는 희망을 놓지 않고 선한 연대의 힘을 보여주었던 '페스트'의 인물들처럼 지혜롭게 위기를 견뎌내고 있다. 하루빨리 공연의 설렘과 감동을 무대에서 느낄 날이 오길 바란다.

박병성(공연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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