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JTBC
SBS ‘내 남자의 여자’(2007)에서 친구의 남편을 빼앗으려는 파격적인 불륜녀로 등장해 안방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김희애는 JTBC ‘아내의 자격’(2012)에서는 동네 치과의사와, ‘밀회’(2014)에서는 애송이 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당당히 ‘사랑’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그가 이번 ‘부부의 세계’로 불륜의 피해자가 되고 보니 들끓는 배신감이 더욱 배가된 것일까. 김희애가 펼쳐보이는 섬세한 감정선에 시청자들도 덩달아 분노가 용솟음치다가 좌절감에 밑바닥까지 추락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깨어진 유리처럼 마음이 산산조각 난 지선우지만, 천하의 김희애가 그냥 넋 놓고 당할쏘냐. 김희애도 “황폐해진 내면을 위선과 기만으로 감춰야하는 이 비루함, 여기가 바로 지옥이었구나. 이 지옥 같은 고통을 어떻게 돌려줄까. 남김없이. 공평히. 완벽하게”라는 독백으로 무서운 복수의 서막을 알렸다. 이어서 처참한 심경을 내비치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느껴지고,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앙심을 내보이는 모습에서 보는 이들의 전율을 일으킨다.
사진제공=JTBC
유리처럼 투명한 감정선을 오롯이 드러내는 지선우는 슬프지만 아름답게 자신을 지탱하고 있다. 무너지는 감정에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고결한 기품은 잃지 않는 비운의 여인이다. 그렇다고 남편의 외도를 그저 가슴에 묻으려는 조선시대 사고방식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소리 없이 복수의 칼날을 가는 모습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핏빛 엔딩 혹은 가증스러운 막장 엔딩이 되지는 않을까 섬뜩한 상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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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김희애가 만들어내는 지선우는 우아한 품위와 소름 돋는 카리스마를 유연하게 오가며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순진무구한 천사에서 냉혹한 악녀로 흑화하는 캐릭터의 변모로 보인다기보다는 김희애의 매력 스펙트럼을 확인하는 중이다. 김희애가 아니었다면 어느 한쪽만이 더 부각됐을 수도 있겠지만, 김희애이기에 연약한 여성미나 표독스러운 팜므파탈이라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두 가지 매력을 모두 훌륭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태오에게 “여자가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달라”며 이실직고할 기회를 준 지선우는 여전히 “나한테 여자는 지선우 하나밖에 없어”라는 이태오의 새빨간 거짓말에 “대답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차분하게 응수하면서 속으로는 육두문자를 날렸다. 이어서 친구 설명숙(채국희)을 시켜 이태오의 내연녀 여다경(한소희)이 임신한 사실을 이태오에게 알리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남김없이, 공평히, 완벽하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한 지선우의 계획이 뭘지 궁금증이 증폭한다.
2회에서 지선우는 폭력 남친에게 되돌아가겠다는 민현서(심은우)를 향해 “아까운 인생 허비하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이었을까. 앞서 1회에서는 “내 인생, 내 아이 인생이 달려 있다. 결혼은 판돈 다 날렸다고 손 털고 나올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라고 민현서에게 말했던 지선우였다. 이제는 달라진 모습으로 가면 쓴 부부의 세계를 손절하고 나올지, 아니면 복수라며 가면 뒤에 숨어 신뢰에 금이 간 결혼의 민낯을 새롭게 보여주려는 것일지 궁금해진다.
치가 떨리는 불륜이 아니어도 이태오와 그의 동기동창 손제혁(김영민)의 입을 통해 “결혼은 가면”, “껍데기뿐인 결혼”이라거나 쇼윈도 부부 혹은 일부일처제 등의 단어들이 수시로 나오는 ‘부부의 세계’는 결혼과 부부의 연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과연 ‘부부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이제 겨우 2회를 방송한 ‘부부의 세계’에서 우리가 더 알게 될 결혼의 민낯은 얼마나 더 기막힌 것일까.
‘내로남불’ 김희애가 불륜의 당사자일 때는 사랑에 대한 고민을 화두로 던지더니, 불륜의 피해자가 되니 결혼과 신뢰에 대한 고민을 화두로 던진다. 고민의 끝에는 응징이든 손절이든 부디 통렬하면서도 속이 시원한 이야기가 되길 바라게 된다. 이같은 바람이 커지는 이유는 그렇지 않을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이 틀린 적이 없었던 경험 탓이리라.
조성경(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