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있는 남자들'을 향한 김희애의 응징과 복수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20.04.01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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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보다 더 스릴 넘치는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완벽한 세계’는 어떻게 구축되고 허물어지는가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의사 지선우 역을 맡은 김희애. /사진제공=JTBC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의사 지선우 역을 맡은 김희애. /사진제공=JTBC


단 2회 만에 시청률 10%라는 기록을 세운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원작보다 훨씬 더 흡인력이 강하다. 한국 정서에 맞게 각색한 까닭도 있지만, 주인공 지선우(김희애)의 모든 감정이 한 올도 빠지지 않고 드러나 그 표정이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하는’ 듯 생생하기 때문이다.

원작인 영국 BBC 드라마 ‘닥터 포스터’가 ‘사랑과 전쟁’ 같은 전형적인 드라마 형식을 따랐다면, ‘부부의 세계’는 범죄 스릴러물 같은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첫 회 지선우가 보여준 몇 개의 표정만으로도 이 드라마가 어떻게 시청자를 흡입하는지 여실히 증명한다.



지선우는 다정한 남편 이태오(박해준)와 사랑스러운 아들, 직장 동료와 상사, 주변 지인들 모두 자신의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는 환경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아직 초반이지만, 이 드라마에서 가장 특색있는 구도는 남자 캐릭터를 ‘악’ 또는 ‘하자’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지선우의 선배 의사 마강석 역으로 나오는 박충선. 가족을 잃고 알코올 중독으로 문제를 일으킨 그는 지선우로부터 해고를 당한다. /사진제공=JTBC<br>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지선우의 선배 의사 마강석 역으로 나오는 박충선. 가족을 잃고 알코올 중독으로 문제를 일으킨 그는 지선우로부터 해고를 당한다. /사진제공=JTBC
첫 번째 하자 있는 인물은 지선우의 선배 의사 마강석(박충선)이다. 가족을 잃고 알코올 중독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그를 제지하는 게 쉽지 않자, 지선우가 나선다. 처음엔 그의 문제를 이해하고 도와주려 했으나, 완벽한 세계를 향한 지선우의 선한 의지가 통용되지 않자 하자 있는 선배를 가차 없이 자른다.

“마광석씨 오늘부로 해고조치 하겠습니다. 두 달 째 근태 불량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진료를 맡길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알코올 중독 의사를 허용할 병원은 없습니다.”

병원장조차 쉽게 꺼내지 못한 말을 부원장인 지선우가 “가족을 잃었다”는 선배 의사의 동정심 유발 멘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렷한 메시지’로 해고 결정을 내린 것은 ‘완벽한 세계’로의 방해는 허용할 수 없다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네 인생에 그런 불행은 없을 것 같아?”라는 선배 의사에 마지막 멘트에도 지선우는 “아무리 힘드셔도 본분을 잊지 말았어야죠”라고 응수한다. 지선우에겐 ‘본분’이 중요하다. 부부의 세계에선 바람을 피우면 안 되는 신의성실의 본분, 피우더라도 솔직히 말하는 정직의 본분 등이 그렇고 직업의 세계에선 마강석씨 같은 사례가 그렇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민현서(심은우, 왼쪽)는 박인규(이학주)로부터 상습 폭행을 당하는 여자 친구로 나온다. /사진제공=JTBC<br>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민현서(심은우, 왼쪽)는 박인규(이학주)로부터 상습 폭행을 당하는 여자 친구로 나온다. /사진제공=JTBC
남녀 관계의 본분은 민현서(심은우), 박인규(이학주)의 사례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폭력을 행사하는 하자 있는 남자 친구를 제지하는 장면에서 지선우는 “너 같은 놈에게 붙일 수 있는 진단명은 얼마든지 있다”며 “자신 또는 타인에게 상해를 입히는 정신질환자는 특별자치 시장 승인하에 정신병원 강제 입원이 가능하다”고 논리적이면서 또렷한 메시지를 던진다.

“상해진단에 정신의 진단 한 장이면 네 인생이 끝난다”는 간결하고 명쾌한 설명은 완벽한 세계와 본분을 거역하는 관점에서 가장 시의적절한 ‘협박’이다.

지선우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이 두 사례에서 정확하게 감각된다. 명확한 메시지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지선우의 일관적인 패턴은 그러나 오직 남편에게만 예외로 남아있다. 남편의 외도를 아는 것도 모자라 주변 인물들까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서 치오른 극단의 분노에서도 의료용 가위를 숨기고 남편에게 키스하는 자제력을 발휘한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 한 장면. /사진제공=JTBC드라마 '부부의 세계' 한 장면. /사진제공=JTBC
완벽한 세계에 방해되는 ‘타자’는 쉽게 물리칠 수 있지만, 자신과 함께하는 ‘가족’은 결국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기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진료 과정에서 만난 불륜녀 여다경(한소희)이 “그 남자(이태오) 결혼이 불행하대요. 껍데기뿐인 결혼이라고” 한 말을 되뇔 땐 잘못이 자신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역(逆) 투사(다른 사람에게 죄의식, 열등감, 공격성과 같은 감정을 돌림) 방어기제에 빠지기도 한다.

잘못은 남편이 했는데도, 앞선 두 사례처럼 맺고 끊는 결단이 부족한 추가적 또는 결정적 요인으로는 폭력을 당한 민현서의 말 한마디 때문이다. “그런 놈하고 얽혀서 한 번뿐인 인생 낭비하고 싶어요?”라고 지선우가 묻자, 민현서는 이렇게 답한다. “그 사람 인생이 나한테 달려있으면요? 인생 잠깐 꼬인 걸로 화풀이하는 거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에요. 내가 꼭 괜찮은 남자로 만들 거예요.” 지선우는 “사람 그렇게 쉽게 안 바뀐다”고 하자, 민현서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사랑해서 그래요. 내가”

민현서의 말을 남편에게 적용하면 ‘잠깐 핀 바람’으로 ‘눈속임’하는 거지 나쁜 남편은 아닐 것이고 지선우 자신이 ‘꼭 괜찮은 남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해서 그런 것이다. 내가’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남편 이태오 역을 맡은 박해준. /사진제공=JTBC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남편 이태오 역을 맡은 박해준. /사진제공=JTBC
지선우는 자신의 가족이 흔든 ‘완벽한 세계’는 다시 구축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직장 선배 의사와 누군지도 모르는 폭행남에게 주지 않던 세 번의 기회를 남편에게 허용한다. “여자 있지?”라고 담담하게 묻는 첫 번째 기회. 남편은 묵묵부답이다.

대놓고 물어본 어쩌면 황당한 질문에 지선우도 당황했는지 두 번째 기회의 질문에선 비참한 톤으로 애걸하듯 말한다.

“우리 결혼할 때 살다 보면 다른 상대가 눈에 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잖아. 그땐 서로 솔직해지자고. 이제라도 태오씨가 솔직하게 인정하고 깨끗이 정리하면 나 용서할 수 있을 거 같아. 잠깐 육체적으로 끌렸을 뿐이잖아. 그치?” 남편은 냉정하게 쏘아보는 것도 모자라 되레 화난 듯한 표정까지 짓는다.

마지막 기회는 거짓말과 용서의 질문이다. “그런데 거짓말은 용서 못해. 그건 진짜 배신인 거야.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줘.”

드라마 '부부의 세계' 중 한 장면. /사진제공=JTBC<br>
드라마 '부부의 세계' 중 한 장면. /사진제공=JTBC
아내는 감정과 이성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던졌다. 솔직함의 최소 예의를 기대했던 아내의 바람은 뜬구름이었을까. “우리 사이에 신뢰가 이것 밖에 안 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대꾸를 하지.”

세 번의 기회에도 ‘정답’을 내놓지 못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다음 수순은 하자 있는 남자들을 향한, ‘타자’에 대한 응징과 복수의 전철 그대로다. 아니, 타자는 단 한 번의 응징으로 끝냈을지 모르지만, 타자화된 가족의 응징 또는 복수는 곱절, 아니 갑절이 되기 십상이다. 2회는 전초전에 불과하다. 불륜녀의 임신 사실만 알렸을 뿐이니까.

‘완벽한 세계’란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인간은 불완전할 때 완전을 향한 목표가 생기고 ‘완벽’이라는 느낌이 들 때 그 의미는 낭떠러지로 접어든다는 사실을 이 드라마가 소름 끼치도록 각인시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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