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과거 위기에서 우린 무엇을 배웠나

머니투데이 김익태 증권부장 2020.03.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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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금융당국을 출입했다. 리만브라더스 파산이 급속한 신용경색으로 이어졌고, 원/달러 환율은 폭등했다. 증시는 폭락했고, 자금 조달이 막혀 도산 위기에 빠진 기업들은 아우성이었다. 매일 대책이 쏟아져 나왔고, 취재 경쟁에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잇따른 회의와 보고로 당국자들과는 통화조차 어려웠다. 한마디라도 듣기 위해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 한 고위 당국자는 안쓰러웠는지 “여기서 이러지 말고 97년 외환위기 극복 백서를 찾아봐” 귀띔해줬다. 급하게 백서를 구해 펼쳤다. 긴박했던 당시 상황과 당국의 대응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한발 앞 선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역병 하나가 전 세계를 대혼란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공급과 수요 부족, 신용경색이 한 꺼 번에 밀려오는 말 그대로 전대미문의 글로벌 경제 위기다. ‘V형’ 회복을 얘기하는 낙관론자들부터 ‘U형’ ‘L형’, 심지어 경기 침체가 대공황보다 훨씬 더 나쁘다(I형)고 말하는 비관론자도 있다. 그만큼 회복 속도에 대한 예측이 어렵다는 방증이다.

최근 2008년 위기 극복 백서를 꺼내 들었다. 충격에 비례해 규모만 커졌을 뿐 당국이 꺼낸 카드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 산업, 금융, 가계 등 각 분야에서 벌어질 혼란과 고통이 그려졌다. 하지만 어느 한 미국 시인이 얘기했듯 이 또한 지날 갈 거다. 혼란이 끝나면 상황 수습 국면이 펼쳐진다. 안타깝지만 시차의 문제지 정부의 부양책에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기업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김없이 KDB산업은행이 등판할 거다.



이번엔 달라야 한다. 쓰러진 기업들이 싸게 매물로 나오면 누군가는 시장에서 받아줘야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산업은행은 전면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과거 두 차례 위기를 겪으며 경험했다. 국내 자본시장에 PEF(사모펀드)가 없던 시절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태생적으로 비효율성을 내포한다. 경영인 선임부터 정부의 입김이 세게 들어오고, 경제 논리에 벗어난 정치권과 노동조합의 요구에 휘말린다. 면피하기 위해 매각을 안 하거나 버티는 일도 벌어진다.

대우조선해양, KDB생명, STX그룹, 대우건설, 성동조선… 그간 ‘KDB 그룹’이 거느린 기업들 중 효율적인 경영 개선을 통해 제대로 매각이 이뤄졌던 곳이 있었나. 그런데 누구도 여기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산업은행을 동원하는 순간 새로운 화근이 싹튼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초저금리 시대다. 시중에 돈이 넘쳐난다. 그 돈을 돌게 해줘야 한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춰 돈을 공급해도 은행이 그 돈을 쓰겠나.
PEF가 경제 안전망이 돼야 한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PEF 말고 할 곳이 없다. 외환 위기를 거치며 토종 자본이 주축이 된 사모펀드 필요성이 제기됐다. 2004년 PEF 제도가 도입됐고, 국내 PEF 시장은 갈수록 성장했다.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 대체투자 확대, M&A(인수·합병) 시장 성장, 경쟁력 있는 운용 인력 등이 그 토대가 됐다. 경영참여형 PEF의 출자약정액 총액은 2019년 3분기 말 약 82조원에 달한다.


웅진그룹의 코웨이, 동양그룹의 동양매직(현 SK매직), SKC코오롱PI 등 그룹사의 유동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알짜 매물로 나온 곳들도 PEF가 인수했다. 인수 뒤 경영 개선 효과가 극대화되며 더 높은 가치에 다시 기업의 품에 안겼다. PEF가 산업의 윤활유 역할을 하며 경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도 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도 정부가 구조조정의 키를 쥐고 싶다면 산업은행은 PEF에 자금만 공급하고 뒤로 빠져야 한다. 성공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굳이 꼽자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만든 ‘모태펀드’ 방식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책임 소재도 명확해지고, 자본시장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또 한 번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터널에 진입했다. 우린 과연 과거 두 차례 위기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교훈을 얻었다면 바뀌어야 한다. 또 한 번의 헛발질이 나올까 우려스러워하는 말이다.
[광화문]과거 위기에서 우린 무엇을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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