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전쟁, 미국 40년만의 감산으로 끝날까

머니투데이 강기준 기자 2020.03.23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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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BBNews=뉴스1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BBNews=뉴스1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로 인한 글로벌 석유 수요 감소에 산유국들간 유가전쟁까지 펼쳐지며 국제 유가가 석달도 안돼 60% 곤두박질 쳤다. 시장은 현재 20달러선이 붕괴되고, 상황이 악화할 경우 마이너스유가 시대까지 열릴 가능성을 경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원유 감산 카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국제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 사우디 주도의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간 감산을 통해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이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린 데에 불만이 터지기 시작한 시점에서 가장 원만하게 전쟁을 끝낼 방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40여년만에 감산 나설까
21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0일 모하메드 바킨도 OPEC 사무총장과 라이언 시튼 텍사스철도위원회(TRC) 위원이 감산 논의를 했다고 보도했다. 1891년 설립된 텍사스철도위원회는 이름과 달리 텍사스 석유와 천연가스 산업을 규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FT는 OPEC이 텍사스주 에너지 규제당국 및 미국 셰일오일 생산업체들과 감산 논의를 하는 전례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미 공화당 정치인이기도 한 시튼 위원은 “우리는 협상 카드 중 하나로 감산을 제안할 수 있다”면서도 “결정은 결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할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건 대통령이 협상을 원하면 텍사스가 협상테이블에 앉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서도 “바킨도 사무총장과 세계 원유 공급과 수요 문제에 대한 좋은 대화를 나눴다”면서 “우리는 코로나19에서 회복하고, 경제적 안정성을 확신하기 위해선 국제적인 거래를 맺어야할 필요가 있음에 합의했다”고 말했다. 바킨도 사무총장이 오는 6월 예정된 OPEC 정상회의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미국이 셰일오일 감산에 합의할 경우 이는 40여년만에 첫 감산이 된다. 바킨도 사무총장이 미 셰일업체들을 만난 것도 2014년 유가 폭락 이후 6년만의 일이다.


앞서 지난 19일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소식통을 인용해 TRC가 원유 생산량을 줄이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서부 텍사스산중질유(WTI)가 지난 1월 이래 절반 넘게 폭락하며 23달러선까지 주저앉자 셰일오일 생산업체들이 TRC에 대책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WSJ는 구체적으로 TRC가 올 연말까지 하루 50만 배럴 감산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영세업체를 제외하고 규모가 있는 업체들이 각각 10%씩 생산량을 줄이는 방식을 통하면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대니얼 옐진 IHS마킷 부사장은 “현대사에서 이처럼 수요가 붕괴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면서 “이번 사안은 석유업계가 현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체 감산에 응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11월 대선이 점점 다가오는 데다가 사우디와 러시아가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에도 증산 방침을 굳히고 있어 한발 물러서는 방안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감산안을 제시한 시튼 위원이 공화당 소속일 뿐만 아니라, 텍사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텃밭이기 때문에 이들의 요구를 마냥 흘려듣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가지고 있는 카드 세 장 중 두 장을 이미 꺼낸만큼, 마지막 승부수는 미국의 감산일 수 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20일 미 행정부가 고위 에너지 대표들을 사우디에 파견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감산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석유업계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 19일 미국산 원유 7700만배럴을 매입하겠다고 했고, 그러면서 사우디에는 러시아의 유가전쟁에 개입해 중재하겠다고 밝혔었다. 기본적으로는 사우디에는 생산량을 예전 수준으로 줄이라는 요청과 함께 러시아에는 더한 제재 카드를 꺼내겠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으로 저유가를 유발한 코로나19가 해소될 때까지 유가 충격이 해소되진 않겠지만, 미국이 자체적인 감산을 통해 중재에 나설 경우 유가전쟁이 멈출 수 있다고 보고 있다.

3년만에 깨진 '유가 동맹'...두달새 60% 가격 폭락 불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오른쪽). /AFPBBNews=뉴스1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오른쪽). /AFPBBNews=뉴스1


2017년부터 사우디와 러시아는 국제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 서로 감산 공조 체제를 구축해 왔다. 덕분에 국제 유가는 그동안 배럴당 50~60달러 박스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협력관계가 지난달말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세계 석유 수요가 줄어들자 사우디가 이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집합체인 OPEC+(플러스)가 이달초 감산 논의에 돌입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가 사우디의 감산 제안을 거부하면서다. 매번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 감산을 결정할 때마다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이 빈자리를 메우며 시장점유율을 올리고 있다는 게 불만이었다. 여기에 러시아는 자국과 유럽을 잇는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 구축에 미국이 제재를 가한 것도 큰 불만이었다.



유럽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는 40% 이상으로 매우 높다. 노르트 스트림2가 가동되면 이 비중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2018년 부터 미국은 천연가스가 남아돈다며 본격적인 수출을 예고하며 러시아를 자극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7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참석해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면전에 대고 “독일이 러시아의 포로가 됐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70여년간 NATO의 주적이었던 러시아에 유럽 각국이 에너지 의존을 높이고 있는 걸을 비난함과 동시에 미국내 천연가스를 유럽에 수출하겠다는 속내였다.

불만이 쌓이던 러시아가 감산을 반대하자, 결국 지난 8일 사우디는 4월 원유수출 가격을 3월대비 6달러 인하하고 원유 증산까지 시사하며 유가전쟁을 시작했다. 사우디는 다음달부터 하루 평균 970만배럴의 원유 생산량을 1000만배럴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10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노박 에너지부 장관은 “단기적으론 하루 20만~30만배럴, 최대 하루 50만배럴 증산도 가능하다”고 맞불을 놨다. 하루 1130만배럴 수준을 1180만배럴까지 증산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튿날 사우디 국영 석유업체 아람코는 “하루 최대 1300만배럴로 늘리겠다”고 공시했다. 기존보다 30% 이상 생산을 늘리겠다며 치킨게임을 시작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아람코가 하루 최대 생산량 1200만배럴을 넘어 전략비축유까지 시장에 쏟아붓겠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같은날 OPEC 회원국인 아랍에미리트(UAE)도 유가전쟁에 동참하며 “4월부터 하루 300만배럴 생산량을 400만배럴로 늘리고, 이후에는 하루 500만배럴까지 산유 능력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같은 산유국간 치킨게임에 올 1월 60달러였던 유가는 절반넘게 폭락해 현재 선물시장에서 18년만에 최저치인 23달러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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