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전혀 다른 조건, 다른 상황에 부닥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매뉴얼 자체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다. 이른바 ‘매뉴얼의 함정’이다. 위기대응 전문가들이 매뉴얼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매뉴얼 만능주의’를 경계하는 이유다.
감염병 신고 및 조사대상 지침을 담은 사례정의 개편이 대표적이다. 신규 환자가 발생하거나 진단검사를 거부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사례정의를 고치는 식이었다. 16번째(여·43)와 56번째 환자(남·75)는 2~3차례나 선별진료소를 찾아갔는데도 검사를 받지 못했다. 피 섞인 가래와 기침, 고열을 확인한 병원에서 감염이 의심된다며 진료의뢰서까지 써줬는데도 검사를 거부당했다고 한다. 중국 방문 이력과 환자 접촉 이력 등 조사대상 지침에 맞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심지어 중국 우한과 일본 크루즈선 ‘다이아몬드프린세스호’에 갇힌 우리 국민을 국내로 이송하는 문제조차 주변국 눈치를 보며 뒷북으로 일관했다. 그 사이 세계 80여개국은 한국에 빗장을 걸고 나섰다. 당연히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더이상 어떤 명분이 필요한가.
위기경보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달 중순부터 감염원을 알 수 없는 환자가 속출하고 신천지 대구교회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하자 전문가들은 선제적으로 위기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할 것을 거듭 요구했지만 정부는 그때마다 “아직 초기단계”라며 한가한 소리를 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600명 넘는 환자가 발생한 뒤에야 위기경보를 격상해 비판을 자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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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매뉴얼에 매몰돼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후행하는 처방전만 내놓으면서 사태를 키운 셈이다. 환자가 속출하면서 중증도 분류, 병상 확보 등 시급히 해결할 문제가 속속 불거지는 최근에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여전하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에도 나타난 문제점들이 고쳐지지 않은 채 지금도 그대로 반복된다.
정부는 반드시 ‘코로나19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 위기상황을 보다 뚜렷하고 분명하게 담기 위해서는 사태가 종식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는 모든 게 무뎌지고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백서의 내용은 정확하고 세밀해야 한다. 코로나19 발생부터 확산 때까지 시기별로 정부 대응의 잘잘못을 빠짐없이 담아야 한다. 특히 상황을 어떻게 오판했고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고해성사하듯 낱낱이 기록해야 한다.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만든 백서와 이를 토대로 새롭게 구성한 감염병 위기대응 매뉴얼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변종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강력한 백신이 될 것이다.
코로나19 백서와 새로운 감염병 위기대응 매뉴얼의 표지에는 꼭 이런 문구를 넣어주기 바란다. ‘매뉴얼을 맹신하지 말고, 현장에 귀 기울여라. 절대 꾸물대지 말고, 한발 앞서 움직여라. 그렇지 않으면 또 실패한다.’ 지금 청와대와 정부에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