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SBS '하이에나'
상대가 너무 쉬우면 김이 새는 법이다. 쉽게 속아 넘길 수 있는 만만한 상대보다는 힘 있고 빽 있는 상대로 한 싸움에서의 승리가 더 짜릿하다. ‘하이에나’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후천성 겸손 결핍증 사나이 윤희재를 공들여 소개하며 문을 연 건 이 때문일 테다. 정의보다는 명예가 먼저고, 승소 앞에 악플 따위 두렵지 않은 남자.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남자. 여기에 187cm의 큰 키와 군더더기 없는 몸매, 다른 느낌을 발산하는 짝눈, 잔망스러움과 퇴폐미라는 양면성을 오가는 주지훈 특유의 매력이 더해져 윤희재는 비로소 천상천하 유아독존 캐릭터로 완성된다.
자기밖에 모르던 이 까칠한 남자는 김희선으로 위장한 정금자의 박력(?)에 반해 사나이 순정뿐 아니라 한정 판매 고가 시계까지 어렵게 구해 바친다. 그 와중에 정금자는 윤희재가 변호를 맡은 고객 정보를 그의 노트북에서 슬쩍 빼돌리는 데 성공하니, 결과는? 정금자, 승소! ‘하이에나’ 1, 2회는 정확히 정금자에게 설계 당하는 윤희재에 대한 소개이자, 윤희재를 덥석 무는 정금자란 캐릭터에 대한 알람이다. 일명 ‘진흙탕 싸움’의 서막.
그녀에게 준 사랑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배신감 때문인지, 스크래치 난 자존심 때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종종 흔들리는 희재. 급기야 의뢰인에게 협박당하는 정금자에게 “양아치, 칼빵 조심”이라는 카톡을 보내 위험을 미리 알려주는 것도 모자라, 그녀가 메시지를 확인했는지 안절부절못해하며 사라지지 않는 카톡 ‘1’에 집착한다. 한번 발을 들인 사랑이라는 게 그렇다. 머리카락에 붙은 껌딱지처러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 잊었다 방심했을 때 기습적으로 떠오른 것. 희재에 반해 정금자의 감정은 아직 단호해 보인다. 두 사람의 경쟁에서 금자가 우위에 서 있다고 여겨지는 건 이 때문이다. 사랑학개론에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이므로.
사진제공=SBS '하이에나'
이 시각 인기 뉴스
“변호인들이 대거 등장하는데도 법정 드라마가 아닌 캐릭터 드라마라는 점이 출연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였다. 변화무쌍하고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고 밝힌 김혜수의 말대로 ‘하이에나’의 미덕은 캐릭터들이 빚어내는 갈등과 유머다. 특히 고객 영입을 위해 ‘여러분’을 열창하며 폭탄주 제조 신공을 보여주는가 하면, 건장한 남자와 1대 1로 붙어 밀리지 않는 기세를 우렁차게 드러내고, 그 누구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사건 안으로 혈혈단신 걸어 들어가는 김혜수는 열성과 투쟁과 측은지심을 끌어모아 정금자라는 캐릭터를 풍부하게 조립해낸다. 수많은 스타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쇼비즈니스 세계에서 30년 넘게, 그것도 대중의 관심에서 한순간도 멀어지지 않은 김혜수라는 배우의 저력. 책받침 속 ‘청순의 대명사’에서 건강하고 섹시한 여성의 아이콘으로 진일보한 현재 진행형 배우의 존재감이다. 차가워 보이는 외양 뒤로 인간적이고도 방정맞은 면모를 드러내며 의외의 웃음을 안기는 주지훈의 패기도 김혜수라는 존재 앞에 꿇리지 않는다.
다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흥미로운 정금자와 윤희재 캐릭터는 막상 함께 있을 때 예상만큼의 폭발적인 케미를 아직 보여주지는 못하는 인상이다. 단순히 주연 남녀의 실제 나이 차이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랬다면 방송 전 공개했던 포스터에 그토록 눈길이 갔을 리 없다. 싸우는 듯 사랑하는 듯, 닿을 듯 말 듯, 포스터 속 두 배우가 자아낸 짜릿하고도 아슬아슬하게 섹시한 분위기 말이다. 그러니까 포스터에서 감지됐던 두 인물의 폭발적인 케미가 아직 방송에서는 실리지 않고 있다는 의미인데, 이는 초반 설정의 허약함에서 기인한 면이 있다.
즉, 윤희재가 정금자에게 빠져들어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과정의 개연성이 아무리 봐도 빈약하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가 사랑에 한 눈이 팔려 중요한 정보를 흘리게 된다는 설정 역시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두 사람이 ‘꽁냥꽁냥’하는 초반 장면들이 낯간지럽게 느껴진다면, 이는 배우 합의 문제라기보다 두 캐릭터가 그렇게 보일 만한 합당한 사연을 충분히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야 겨우 삽을 뜬 드라마이기에 유보적 입장이지만, 아직 ‘하이에나’엔 작가 개인의 참신한 문법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법정물을 표방한 캐릭터물”이라고 밝힌 제작 의도에 부합하게 배우 개개인의 독자적인 매력이 극 깊숙이 침투해 있고, 당하기만 하던 윤희재의 각성과 함께 이들의 매력이 전진해 나갈 판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스타트다. ‘쩐의 전쟁’ ‘뿌리깊은 나무’ ‘별에서 온 그대’ 등에서 확인한 장태유 PD의 특유의 리듬감 넘치는 편집의 묘미와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빠지는 카메라 역시 초반부의 몇몇 내러티브 구멍을 막아내며 앞으로의 극적 재미 확장 가능성을 도모하는 느낌이다. 판은 깔렸고, 두 하이에나의 으르렁 싸움도 본궤도에 올라왔으니, 이제 신예 김루리 작가가 보여 줄 차례다.
정시우(칼럼니스트,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