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문 연 이재현 회장, 스필버그 마음 움직인 비결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20.02.13 16:01
글자크기

‘설탕산업’에서 ‘문화강국’으로…이재현-이미경 남매의 25년 ‘뚝심 "강국의 전제조건은 문화"

제일제당은 1995년 CJ로 기업명을 변경하고 제조업에서 문화사업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그해 CJ는 영화사 드림웍스와 투자 계약을 하고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왼쪽부터 제프리 카젠버그, 이미경 부회장, 데이비드 게펜, 스티븐 스필버그, 이재현 회장. 카젠버그와 게펜, 스필버그는 드림웍스 공동 설립자다. /사진제공=CJ그룹제일제당은 1995년 CJ로 기업명을 변경하고 제조업에서 문화사업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그해 CJ는 영화사 드림웍스와 투자 계약을 하고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왼쪽부터 제프리 카젠버그, 이미경 부회장, 데이비드 게펜, 스티븐 스필버그, 이재현 회장. 카젠버그와 게펜, 스필버그는 드림웍스 공동 설립자다. /사진제공=CJ그룹


“기업이 무슨 문화를….” “계속 설탕이나 팔지, 왜 이익도 안 남는 영화를 한다고.”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업계가 CJ를 향해 내뱉은 쓴소리는 한때 뼈아픈 충고 같기도 했다. 문화는 그저 ‘놀이’일뿐 생계를 책임져 줄 ‘산업’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설탕’을 팔던 제일제당은 1995년 회사명을 CJ로 개명하고 영상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설탕 이후의 미래 산업 중 금융과 정보통신 같은 업종이 후보에 올랐으나, 이재현 회장의 눈이 쏠린 곳은 오로지 ‘문화’, 그리고 ‘문화사업’이었다.

그해 4월 29일 CJ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합작회사를 만들기 2년 전, 당시 상무였던 이재현 회장은 영화산업의 메카인 드림웍스에 눈독을 들였다. 첫 협상은 보기 좋게 결렬됐다. 이 회장은 곧바로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화 차림으로 스필버그 개인 스튜디오인 ‘앰블린’을 찾아 피자를 주문해 식사하며 20억 달러 규모의 사업계획을 논의했다.



계약은 성공적이었다. 95년 4월, 제일제당이 3억 달러를 투자하는 2대 주주로 참여해 아시아 지역(일본 제외)의 판권을 보유하며 영화배급, 마케팅, 영상 관련 기술 등 할리우드의 노하우를 지원받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 해 8월, 멀티미디어사업부가 신설돼 CJ엔터테인먼트가 출범했고, 98년엔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인 ‘CGV강변11’이 오픈했다.

최고경영진 중 한 명인 이재현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당시 이사) 역시 ‘문화광’이었다. 무엇보다 잘 만든 문화 콘텐츠 하나가 미치는 파급력에 주목했다.

이 부회장은 당시 한 강연회에서 “미국 유학 시절, 문화에 대한 놀랍고 충격적인 경험이 많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며 “하지만 부러워할수록 깊은 상처로 남아 ‘어떻게 한국을 알려야 할지 고민으로 이어졌다. 결국 답은 ’문화산업‘이었고 한국 문화의 글로벌화에 대한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다짐이 생겼다”고 말했다.


영화 '기생충'이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LA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자, 이미경(미키리) CJ그룹 부회장이 무대에 올라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영화 '기생충'이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LA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자, 이미경(미키리) CJ그룹 부회장이 무대에 올라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남매의 ‘문화 편력’은 할아버지 이병철 선대회장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선대 회장은 평소 “문화 없이는 나라도 없다”고 강조했고, 이재현 회장도 “역사적으로 경제 강국의 전제 조건은 문화 강국”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미경 부회장은 ‘실무’에서 탁월한 안목을 발휘했다. 봉준호 감독의 재능을 알아보고 여러 작품을 후원했고 이번 ‘기생충’ 세계 홍보 투어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CJ는 그간 비판도 많이 받았다.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 독점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군소 문화 생태계를 교란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모든 문화가 ‘CJ’로 통하느냐는 냉소 어린 시선은 문화 다양성이나 독창성 같은 가치를 쉽게 죽인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또 엠넷의 투표 조작 등으로 기업 이미지가 훼손되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CJ가 지금까지 그린 대한민국의 문화 산업 지형도에서 외형의 확장과 내실의 수준을 이 만큼 끌어 올린 흔적의 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 같은 대형시장에서 국내 문화 기술을 전파해 산업 규모를 성장시키고 ‘마마’ 같은 시상식을 통해 콘서트, 한식 등 한국의 문화를 동시다발적으로 맛보게 하고, 정체된 지상파 방송의 음악 프로그램과 비교할 수 없는 최첨단 무대 구성을 통한 세계적 수준의 무대를 구현해 낸 성과 등은 작지만 꾸준히 쌓아 온 CJ의 노하우와 산업을 보는 안목이 작용한 결과물인 셈이다.

이 모든 과정에 남매의 뚝심과 욕심, 팬심 등 3심이라는 문화 욕구에 용기, 모험, 실험 같은 ‘무모한 도전’의 본질이 스며있었다.

제프리 카젠버그 드림웍스 최고경영자는 CJ엔터테인먼트 출범 15주년 기념 방한에서 “짧은 기간에 방송, 영화, 음악, 공연 등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그룹과 식품, 유통 등 라이프스타일 기업이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다는 게 놀랍다”며 “미국이나 유럽 기업도 쉽게 만들어내지 못한 포트폴리오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평소 문화강국의 실현을 강조해왔다. 이 회장은 "역사적으로 경제 강국의 전제 조건은 문화"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평소 문화강국의 실현을 강조해왔다. 이 회장은 "역사적으로 경제 강국의 전제 조건은 문화"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재현 회장은 지난 2011년 상암동 시대를 여는 CJ E&M 개국식에서 김구 선생의 말을 인용했다. “국력이라는 건 외침을 막을 정도면 되지만, 문화는 해외에서 국격을 높이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나라를 꿈꾸는 겁니다.”

문화 영역은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역적’이다. 특히 기업이 문화에 도전하려면 질긴 인내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해마다 성과나 이익이 없다면 당장 손에서 내려놓는 게 기업의 상식이다.

25년간 수많은 부침 속에서 CJ 콘텐츠들이 계속 생존할 수 있거나 유일한 경쟁력을 가진 상품으로 인식되는 건 문화상품을 향한 오너들의 태도가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단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오스카’ 4관왕이라는 전설의 이야기가 ‘필연’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꿈은 꾸는 자의 몫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