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공정위, 처분시효 만료 알면서도 숨겼다"

머니투데이 오문영 기자 2020.02.1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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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원인과 진상을 바로 알리기 위한 '가습기살균제 참사: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전국순회 전시회가 지난해 11월25일 세종시 보람동 세종시청 로비에서 열렸다./사진=뉴시스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원인과 진상을 바로 알리기 위한 '가습기살균제 참사: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전국순회 전시회가 지난해 11월25일 세종시 보람동 세종시청 로비에서 열렸다./사진=뉴시스


공정거래위원회가 2017년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 업체들의 표시광고법 위반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할 당시 내부적으로는 이미 처분시효가 지난 것으로 판단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기업들을 봐준다는 비판을 피하고자 '면피성' 조사에 나섰다는 것이다. 조사 끝에 공정위가 내린 과징금 처분은 결국 법원에서 '처분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취소됐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모임 '너나우리'의 이은영 대표는 지난 7일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공정위 내부전산망 '사건처리 3.0'에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처분시효가 2016년 10월1일로 기재돼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10일 밝혔다. 당시 실무자였던 서울사무소 사무관이 같은해 6월1일에 등록한 것이다. 이 때는 공정위가 대외적으로 공소시효가 남아있다고 주장하던 시점이다.



공정위는 세 차례에 걸쳐 가습기살균제 관련 기업들을 조사했다. 여성환경연대는 2011년 10월 SK케미칼·애경 등이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하면서 '가족 건강에 도움' 등 거짓 광고를 했다며 1차 신고를 했다. 공정위는 이듬해 2월 무혐의로 내부종결했다.

공정위는 2016년 4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부터 같은 내용의 신고를 받았다. 같은해 8월 '위해성이 확인된 바 없고, 환경부가 추가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이유로 심의종결됐다.



하지만 두번째 심의 종결한 직후 기업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공정위는 "2016년 사건을 기준으로 보면 처분시효가 2021년 5월까지이기 때문에 CMIT·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의 인체 위해성이 입증될 경우 시정명령과 과징금 조치를 내릴 수 있다"고 해명했다. 2012년과 2016년 사건은 별개이고, 환경부의 조사 결과 위해성이 확인되면 재조사가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공정위는 김상조 전 위원장 취임 뒤인 2017년 9월 재조사에 나섰다. 환경부의 위해성 인정자료를 통보받은 이후였다. 2018년 3월 SK케미칼·애경·이마트 등에 대해 시정명령 및 과징금 1억3400만원을 부과했다.

하지만 법원은 '처분시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결정이 위법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2011년과 2016년 조사는 동일한 내용의 사건"이라며 "공정위는 별개의 사건으로 판단하고 직권 인지하는 형식을 갖춰 2016년 부과 처분을 내렸으나 이는 공정위 내부의 사무처리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 대표는 "공정위는 재신고 사건의 처분시효를 내부적으로 명확히 판단했다"면서 "그럼에도 처분시효가 남아있는 것처럼, 위해성만 입증되면 처분할 수 있는 것처럼 국민들을 속이고 피해자들을 기만했다"고 주장했다.

검찰고발의 근거된 '판매 전표'…"확보과정도 의심스러워"
2017년 10월30일자 '가습기살균제 사건' 관련 공정거래위원회 출장신청서/사진=가습기살균제 피해자모임 제공2017년 10월30일자 '가습기살균제 사건' 관련 공정거래위원회 출장신청서/사진=가습기살균제 피해자모임 제공
가습기살균제 사건 피해자들은 공정위가 2017년 재조사 과정에서 관련 제품 1개가 판매된 근거를 찾은 과정도 석연치 않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이를 토대로 2018년 2월 SK케미칼 법인 및 전직 대표이사와 애경 법인 및 전직 대표이사를 검찰에 고발했다.



공정위는 당시에 제품이 판매된 이후 공소시효(리콜조치 이후 5년)가 끝나 검찰 고발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가습기살균제가 리콜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제품이 판매된 기록을 찾았다며 공소시효를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공정위는 2017년 10월30일 직원 2명을 경기도 고양·대구·서울 종로구·서울 중구·울산 등 5곳에 1박2일로 유통망 현장조사를 보냈다. 그 결과 2013년 4월2일 나들가게 등 소매점에서 '가습기메이트' 1개가 판매된 전표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판매 시점으로부터 5년이 지난 '2018년 4월2일'이 공소시효 완성일이라 주장했다.

피해자들은 공정위가 어떻게 전국에서 5곳을 특정해 갔으며, 전표가 그 5곳에서 나올 수 있었냐는 입장이다. 유선주 전 심판관리관은 "SK케미칼과 애경 등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제품들을 수거하고 있던 상황"이라 설명했다.



검찰은 2018년 4월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제품 1개로는 공소시효를 연장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검찰은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2011년 9월 관련 제품을 회수하고 더 이상 생산과 판매를 하지 않아 해당 시점에 범행을 중단했다고 판단했다.

공정위 가습기살균제 은폐 의혹…서울중앙지검 수사중
유선주 전 공정거래위원회 심판관리관(국장)이 지난달 21일 공정거래위원회의 가습기살균제 사건 은폐 의혹과 관련,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에 고발인 조사를 위해 출석하고 있다./사진=뉴스1유선주 전 공정거래위원회 심판관리관(국장)이 지난달 21일 공정거래위원회의 가습기살균제 사건 은폐 의혹과 관련,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에 고발인 조사를 위해 출석하고 있다./사진=뉴스1
가습기살균제 사건 피해자들과 유 전 관리관은 김 전 위원장 등 공정위 관계자들을 수사해달라며 서울중앙지검에 두 차례 고발장을 접수했다. 유 전 관리관은 사건을 맡은 형사2부(이창수 부장검사)에서 4차례 고발인 조사를 받은 상태다.

앞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유 전 관리관은 지난해 6월 "공정위가 SK케미칼과 애경산업 등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인체 무해한 성분' 등 광고 표현을 검증하지 않고 은폐했다"며 김 전 위원장 등 공정위 관계자 17명을 고발했다.



지난해 12월에는 "공정위가 가습기살균제 사건 처리 과정에서 SK케미칼 등에 대한 무혐의 처분 관련 일체의 공공기록물을 파기했다"며 김 전 위원장 등 22명을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으로 추가 고발했다. 고발 대상엔 2011년 당시 공정위 서울사무소 관계자 등 6명이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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