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근거지' 아세요?…교실에 퍼진 新혐오

머니투데이 박준이 인턴기자 2020.02.0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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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해외여행 등으로 체험학습 가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오히려 개근하는 아이들을 비난하는 말이 있다네요. '개근거지'라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요즘 초등학생들이 개근하면 듣는 말'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학기 중에 체험학습 신청을 하지 않고 개근하는 아이들이 '못 사는 아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개근을 하면 자연스레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게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실제 학부모들은 "해외여행을 가지 않으면 놀림을 받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여행을 보내지 못한 부모는 아이가 상처 받을까 걱정이다. 늘어나는 교실 내 혐오와 차별에 대해 전문가는 우리 사회 전체에 자리 잡은 경쟁 문화를 개선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성실함의 아이콘'에서 '가난의 아이콘'으로 전락한 개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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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까지만 해도 개근상은 성실한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90년대생 박소담씨(26)는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개근상을 받는 친구들을 대단하게 생각했다"며 개근에 대해 "성실하고 모범적인 이미지"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오늘날 개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사라졌다. 개근을 하는 아이들을 '개근거지'라고 비하하는 말까지 등장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둔 누리꾼은 "아이 입학시키면서 '개근거지'라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며 "요즘은 개근하는 아이들이 이상한 거고 선생님들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고 말했다. 일부 다른 누리꾼도 실제로 개근을 비하하는 말을 들어봤다고 했다.

"너 외국 안 가봤어?" 한 반에 2~3명은 학기 중 해외로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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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현상은 해외여행의 증가와 현장 체험학습의 활성화가 영향을 미쳤다. 통계청 '2018 해외여행 경험 추이' 조사 자료에 따르면, 국민 해외여행객 수는 지난 2008년에서 2017년까지 9년간 약 1450만명이 증가했다. 또 2017년에는 해외여행을 가본 인원이 전체 인구의 절반 수준을 넘어섰다.


현장체험학습이 활성화되면서 출결의 의미가 퇴색하기도 했다. 교육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학생 건강권 보장을 위해 개근상 폐지를 공론화한 바 있다. 초등교사인 최찬희씨(26·가명)는 "연휴가 껴 있는 주간엔 한 반에 한두 명, 많으면 세네 명까지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결석한다"고 말했다.

중학생 아이를 둔 김상미씨(성남시 분당구·가명)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빼고 반 아이들이 해외여행을 다 가봤다'고 털어놔서 마음이 아팠다"고 안타까워했다. 상미씨의 딸은 "친구들의 말을 듣고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니 그려려니 했다"고 말했다.

해외여행이 증가하다 보니 몇몇 아이들 사이에선 여행을 가지 않는 아이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도 생겨났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를 둔 신윤미씨(광진구·가명)는 "어느 날 아이가 집에 와서 '우리집은 왜 해외여행 안가?'라고 묻더라"며 "아이들끼리 'OO 안 가봤어?' '외국 왜 안 가봤어?'라고 서로 물어보고 놀린다고 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사회 전체에 퍼진 '혐오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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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은 변할 수 있다. 문제는 교실에 뿌리내린 '혐오'의 정서다. '월거지' '휴거' 등 주거 형태부터 착용하는 옷 브랜드, 방과후 학원, 가족 여행까지…어른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던 차별과 배제의 문화가 초등학교 교실까지 짙게 퍼져나가고 있다. 일부 아이들 사이에선 서로의 집안 환경과 경제적 수준을 비교하고 경쟁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대다수 학부모들은 어른들의 잘못을 지적했다. 신씨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배우는 것이라 부끄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며 "내 아이만이라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외모나 재력이 되지 않도록 가치관을 바르게 키워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무엇보다도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성식 실천교육교사모임 회장은 "가족 여행을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중요한 거라는 걸 가르쳐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으로는 "일부 아이들의 자극적인 혐오 표현이 확산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교실의 혐오 문화가 사라지려면 결국 사회 전반의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고도 진단한다.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 교수는 "아이들이 부모가 세상을 이해하는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며 "요즘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더불어 잘 지내는 것'이 아닌 '남보다 잘하는 것'를 배운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한국 사회의 경쟁 중심적 문화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모든 것에서 우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월함을 유지하는 과정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서로를 배려하고 돕는 것은 당장은 손해처럼 보일지 몰라도, 길게 봤을 땐 사회 전체에 이롭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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