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 '선생님' 대신 별명 부르라고 했더니…

머니투데이 구단비 인턴기자 2020.01.1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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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마다 '진짜 나이' 논쟁…위계질서 없는 대화와 긍정적 효과들

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사진=이미지투데이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사진=이미지투데이


"안녕. 난 요셉이야. 나를 소개하는 세 가지 키워드는 걷기, 석양, 제주도야. 너는?"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나이를 비롯한 학벌, 직장 등을 물어보지 않고 반말로 대화하는 '수평어' 모임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관심사 세 가지를 공유한다.

물론 반말이라고 해서 모두 수평어는 아니다. 수평어는 서로의 합의를 바탕으로, 동등한 관계에서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소통하는 것을 뜻한다. 수평어 모임을 이끄는 이요셉씨는 "동갑·친구 사이에서 사용하는 반말에도 때론 미묘한 수직관계가 존재한다"며 "반말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반말에도 상하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동갑내기 친구지만 "야, 물 좀 떠와"라고 반말을 하는 건 갑과 을의 관계에서 비롯한 명령이 포함되기도 한다. 행인이 외양을 통해 나이를 짐작해 "학생, 자리 좀 양보해줘"라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도 반말일 뿐 수평어라고 할 수 없다.

"수평어 모임 통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됐죠"
/사진=이미지투데이/사진=이미지투데이
이요셉씨가 지난 2018년부터 여가생활 애플리케이션 '프립(Frip)'을 통해 진행해온 수평어 모임에는 그간 3300여명이 참여했으며, 일부는 수평어 모임을 함께 진행하는 동료가 되기도 했다.



이세진씨가 이와 같은 경우에 속한다. 그는 "수평어로 얘기하면 연봉, 직책, 학벌 등 다양한 수식어가 아닌 진짜 '나'로 얘기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며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수평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친근했던 시간", "열린 마인드와 경청하는 자세를 배웠다" 등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진행자 이요셉씨는 "평범한 일상의 대화 속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에 익숙해지다 보니 수평어 모임을 통해 이를 잠시나마 벗어나 친근하고 편하게 대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며 "사람들이 (수평어 모임처럼 위계질서가 없는 대화를) 많이 목말라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선생님 질문 있어요" 아닌 "하루, 이게 무슨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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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모임이 아닌 공간에서 수평어 사용엔 한계가 있을까? 한 대안학교를 졸업한 박인정씨(가명)는 "선생님 호칭 대신 별명을 사용하고, 반말로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며 배웠던 기억이 있다"며 "하고 싶은 말이나 궁금한 질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수평어 사용이 사제관계 유지에 어려움을 주진 않을까라는 우려에 대해 "웃어른에게 존댓말을 하면서도 버릇없게 굴 수 있지 않나"라며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반말이나 존댓말의 영향보단 사람 자체의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명쾌한 답을 내렸다. 특히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반말로 인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후 수평어를 사용하지 않는 학교로 진학한 박인정씨가 가장 크게 불편하게 느꼈던 점은 사제관계가 아닌 선후배관계였다. 그는 "오히려 선생님들은 '한 반의 학생들 나이를 모두 합치면 저보다 많으니, 저는 여러분에게 꼭 존댓말을 써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실천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데 1~2살 많은 선배들이 나와 친구들을 보고 '귀엽네'라는 식의 상대방을 낮춰보는 말을 하는 게 황당했다"고 설명했다.

학교 밖 친구들과는 수평어 모임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박인정씨는 "학교 밖에서 만난 친구들의 나이는 전혀 모른다"며 "나이를 묻지 않고 다 함께 수평어를 사용하니 서로를 존중하고 편하게 지내게 된다. 먼저 태어났다는 게 특권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만 나이? 연 나이? 빠른?…"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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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020년 새해를 맞아 한국의 다양한 나이 셈법을 하나로 통일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수평어 모임을 참석한 사람들이 강조한 것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박인정씨는 "빠른 나이, 한국식 나이, 만 나이 등 어떤 나이던 숫자를 따지게 되면 상하 관계는 또다시 생기기 마련"이라며 "나이를 떠나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하는 문화가 조성되는 게 우선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상황에 수평어가 정답은 아니라고도 설명했다. 이세진씨는 "보편적으로 수평어를 사용하는 게 빠른 시간에는 어렵겠지만, 수평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리는 데 의미가 있다"며 "격식 없이 얘기를 나눌 때, 특히 사석에서 대화를 나눌 땐 자연스럽게 '수평어를 사용해서 대화해볼까'라는 제안이 나오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설명했다. 이요셉씨도 "정보과 지식, 다양성을 나눠 함께 배워가며 살아가는 데엔 오히려 나이가 방해요인인 것 같다"고 전했다.

박인정씨 또한 "처음부터 둘이 수평어(반말)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론 어려운 것 같다"며 "그렇다면 서로 합의해 존댓말을 쓰다가 시간이 지나 함께 반말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어떨까. 서로 존중하며 소통한다는 의미를 있다면 형식은 상관없이 '수평어'라고 생각한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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