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SF의 가능성이란 말 안 해도 될 만큼 완성작 봇물"

머니투데이 김창규 SF작가 2020.01.1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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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공모전] 김창규 SF작가 심사평

"한국 SF의 가능성이란 말 안 해도 될 만큼 완성작 봇물"


<총평>

좋은 작품에 개성과 생명력이 있듯 과학문학상에 응모한 작품들도 일정 부분 색깔과 경향을 보이곤 한다. 그 경향의 변화를 바라보노라면 SF의 본질이 제대로 이해되어가는 모습에 기쁘지만, 가끔 새로운 오해가 눈에 띄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응모작 가운데 여러 편에 공통된 경향이 한 가지 있었다. SF의 구성요소인 ‘경이로움’과 일반문학에서 흔히 일컫는 ‘문학성’을 결합하려는 시도다. 이 시도에 실패한 응모작이 많아 안타까웠다. 기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SF가 본디 품고 있는 문학성을 펼치기보다는 SF를 의식적으로 문학의 바깥에 둔 다음 형식만 끌어와 접목했기 때문이다.



이는 SF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탓일 수도 있고, 문학 자체를 상투적으로 학습한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결과는 행동도 사유도 하지 않는 주인공, 미려하지만 공허한 문장, 결말 없는 이야기로 나타났다.

그와 정반대로, 본심에 오른 응모작들을 보면서는 이제 더 이상 ‘좋은 한국 SF의 가능성’이란 얘기는 듣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뻤다. 그만큼 SF를 충분히 소화하고 빚은 작품들이, 가능성을 넘어 다양한 길을 정하고 완성되고 있었다. SF와 과학문학상이라는 배에 오른 이들이 이미 훌륭한 선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항해에 나선 셈이다.



그 배에서 커다란 돛 역할을 하는 과학문학상이 빼어난 작가들을 계속 발굴하기를 바라면서, 수상자들께 축하와 함께 앞으로 더 보여줄 SF 속 경이감에 대한 기대를 아울러 보낸다.

<장편>

'많은 사람의 죄'는 SF 기믹을 능숙하게, 연달아 제시했으나 그에 비해 중심 이야기에 신선함과 흡인력이 부족했다. '브레이넷(종의 기원)'도 도입부터 ‘기술에 의한 마술 세계’가 본격적인 무대라는 점을 시사하며 시작했다. 이는 SF의 시작으로는 나쁘지 않으나, 끝에 이를 때까지 무대의 설명과 확장에 지나치게 의존해 이야기가 힘을 잃었다.


수상작 '천 개의 파랑'은 처음부터 또렷이 제시된 이야기의 줄기가 흩어지지 않고, 모든 요소가 결말의 완성을 위해 제 역할을 해 균형이 잘 잡혔고, 핵심 소재를 과장 없이 적절히 활용해 좋은 장편 SF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각 등장인물의 역할이나 여러 대사가 다소 중복되는 점 때문에 중편을 확장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있지만, SF가 제시하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공감의 영역이 능숙한 필력으로 펼쳐지면서 그런 단점을 상쇄했다.

<중단편>

대상 '모멘트 아케이드'는 SF 문법에 익숙한 독자와 그렇지 않은 독자의 반응을 모두 계산에 넣은 양질의 지적 유희 그 자체다. 도입이 약간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독자도 작품의 중간 지점부터 이야기의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고, 결말에 담긴 전환 및 그와 직결되는 따스한 시선은 기대를 채우고도 남아 이론이 거의 없이 당선됐다. SF의 장점을 남김없이 발휘한 좋은 예라 하겠다.

우수상 '테세우스의 배'는 다소 익숙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그 익숙함을 추진력으로 극복하고 소설로서 만족스러운 결말에 도달한 점이 무엇보다 인정받았다. 정석적인 SF로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다.

가작 가운데 '그 이름, 찬란'은 연극이라는 매개와 함께 우리나라 작가들이 자주 활용하지 않았던 소재, 즉 외계 지성체와 벌이는 전쟁을 배치하고 매끄럽게 조화시킨 점이 뛰어났다. 하지만 독자가 느낄 여러 감정을 일일이 설명하는 지점이 아쉬웠다.

'네 영혼의 새장'은 이야기에 숨겨진 사실에 도달하기까지는 좋았으나 비밀이 밝혀진 뒤의 효과가 약하고 좋은 결말로 작동하지 못해 아쉬웠다. '트리퍼'는 가능성이 많은 아이디어를 차분히 소개해가는 모습이 좋았으나 미스터리 구조를 채택한 이상 반드시 제시해야 하는 결론 부분에서 조금 성급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수상에 이르지 못한 작품 가운데 '꿈틀 날틀'은 역사의 분기를 더 명확히 그렸더라면 대체 역사 SF로 충분히 작동했으리라는 것이 심사위원의 공통된 의견이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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