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은 SF라도 사회적 가치와 주제의식 녹여야"

머니투데이 정보라 SF작가 2020.01.14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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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공모전] 정보라 SF작가 심사평

"영화같은 SF라도 사회적 가치와 주제의식 녹여야"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어야 한다. 이번 과학문학상 심사의 화두는 이것이었다. 장편부문과 중단편 부문 투고작 모두, 어떤 한 장면이나 사건에 치중해 결말이 불충분하게 갑자기 끝나거나, 작품 초입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부각한 주인공들의 목표나 과업을 중반 이후 혹은 결말에서 아무 이유 없이 내던지는 작품들이 많았다.

주인공(들)이 본래 목표나 과업을 달성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혹은 그런 목표나 과업을 버리기로 하는 과정이나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결과 자체가 줄거리를 이끌며 사건을 일으키는 동인이 된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주인공이 본래 목표를 버리고 초월적인 깨달음을 얻으면서 이야기가 끝나면, 뭐 그럴 수도 있긴 한데 구성적인 측면에서 좋은 작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장편 대상을 수상한 '천 개의 파랑'은 주제의식과 전달하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의 깊이에 더해 수미쌍관 방식으로 분명하게 이야기를 결말짓는 구성이 돋보이는, 여러모로 훌륭한 작품이었다.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나 주제의식도 문학상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올해 제4회 과학문학상 장편 투고작 중 내가 심사한 작품들은 거의 다 SF 추리 스릴러였다. 사건이나 구성이 미국 드라마 혹은 블록버스터 SF 영화나 게임을 연상시켰다. 전개가 빠르고 규모가 크며 매우 재미있는 작품들도 있었다. 그냥 출판사에 일반 투고를 한다면 별 무리 없이 출간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문학상은 이름에 ‘문학상’을 포함하고 있다. 문학상은 앞으로 한국 SF문학, 나아가 SF문학 전반이란 어떠한 것인지 결정하고 본보기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해당 문학상의 수상 작품들을 통해 문학이 예술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엇이며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규정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전개가 빠르고 흡인력(吸引力, 사람의 관심이나 흥미 등을 끌어들이는 힘. 흡‘입’력이 아니다. 흡입력은 물리적으로 빨아들이는 힘이며 냉난방기, 진공청소기, 의료기기 등 SF에 소재로 활용될 수는 있지만 문학 작품의 구성요소 자체와는 조금 다른 분야를 논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이 강하고 대단히 재미있다 하더라도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전달하지 않거나 폭력적, 차별적인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문학상’을 수여할 수는 없다. 이 점에 있어 심사위원들은 예민하게 인식하고 깊이 논의했음을 밝힌다.

중단편 부문 수상작 중 대상작 '모멘트 아케이드'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와 함께 중반 이후의 반전이 작품 전체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은 탁월한 작품이다. 중편은 단편보다는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장편에 비하면 압축적인 분량 안에 구성을 잘 짜야 하는 장르인데, '모멘트 아케이드'는 작가가 SF의 특징과 중편의 특징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 집필한 작품이었다.


우수상 '테세우스의 배'는 복제인간이라는 소재와 종교적 개념, 사회적 갈등, 그리고 추리 스릴러의 문법을 잘 활용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아주 재미있게 단번에 읽었으며, 도입부와 이어지는 결말에서 작가의 유머감각도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가작 수상작 중 '그 이름, 찬란'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우주선 안에서 연극을 공연하기 위한 여러 준비와 우주전쟁을 결합한 독특한 작품이다. 주인공들이 지구를 되찾아야 하는 임무를 띤 군인이라는 최초 설정과 선내 연극공연이라는 줄거리를 통해 화성과 지구의 다른 문화를 보여주는 전개가 무리 없이 엮이는 필력이 훌륭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어휘와 표현이 간간이 어긋나는 감이 있었으나 이 모든 것을 보완하는 결말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네 영혼의 새장'은 매우 다정한 작품이었으며 내가 느끼기에는 좀 더 긴 이야기로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트리퍼' 또한 살인사건 수사를 위해 동물의 기억에 침투한다는 독특한 설정과 결말의 반전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장편과 중단편 부문 대상 수상작들 모두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며, 가작 수상작 중에도 여성 중심의 이야기가 두 편이나 있다. 수상작에 오르지 못한 중단편 부문 투고작 중에도 내가 심사한 작품들 중 여성 서사가 많이 눈에 띄어 기뻤다. 슬펐던 점은 훌륭한 여성 서사이지만 SF가 아닌 작품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단편 '바다를 들이다'는 젊은 여성 주인공이 겪는 빈곤과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과 그로 인해 삶과 세상에 대해 느끼는 전반적인 위협과 공포를 절절하게 그려낸 수작이었으나 SF가 아니었다. 작품이 정말 좋았기 때문에 나는 주인공이 자취방에 바다를 들일 때 사용한 디바이스나 기제에 대한 설명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또 다른 좋은 여성 서사 '그녀의 인생에 결혼은 없다'는 SF적인 요소를 충분히 보여주었고 이야기도 재미있고 주제의식도 명확해서 본심에 올려야지! 올릴 거다! 하고 두근거리며 읽었는데…. 결말이 없었다. 중편 분량을 통해 마지막에서 두 번째 페이지까지 이야기를 끌고 온 힘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하면 모든 일이 조작으로 밝혀지는 단 한 페이지 분량의 결미는 분량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크게 실망스러웠다.

과학문학상에서 요구하는 작품 분량에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라 추정하는데, 그럴 때는 중간의 설명적인 부분이나 주인공의 독백을 조금 잘라내고 끝을 좀더 충실히 마무리 짓는 쪽으로 수정했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중편 '한라와 순임과 나'는 시간 여행이라는 SF적 소재를 활용했고 전개와 구성도 탄탄한 여성 서사였으며 그리하여 본심까지 진출했지만 시간 여행이 과거 회상의 용도로만 미약하게 언급될 뿐 SF적인 특징이 전체적으로 약해서 결국 수상작에는 오르지 못했다.

과학문학상은 어쨌든 ‘과학문학’에 중점을 두어야 하기에, SF로서의 특징이 더 분명하고 SF라는 장르를 통해 주제를 전달하고자 했던 다른 작품들을 선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언제나 모든 글쓰기의 기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는 한국어 어휘와 표현들의 의미와 용법과 올바른 맞춤법을 알고 글을 써야 한다. 소설을 쓸 때는 여기에 더해, 퇴고하면서 작품의 시점이 1인칭인지 3인칭인지,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되어 있는지, 설정이 충돌하지 않는지 등등도 점검해야 한다.

작품의 시점이 처음부터 내내 3인칭이었다가 중간에 갑자기 아무 설명 없이 1인칭으로 바뀐다거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한 글자씩 바뀌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반복되면 독자 입장에서는 이것이 어떤 정교한 문학적 장치라기보다는 오타와 퇴고 부족의 결과라고 먼저 생각하게 된다.

올해도 좋은 작품들을 많이 읽게 되어 개인적으로 보람찬 경험이었다. 심사위원들 간에 치열한 논의가 있었고,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서 모든 심사위원이 고민하고 토론했음을 밝힌다. 수상하신 작가님들께 진심으로 축하 드리며 앞으로도 훌륭한 작품들을 계속 발표해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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