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기름밥, 밤엔 이틀마다 숙직" 글로벌 LG 이끈 구자경 45년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2019.12.1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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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왼쪽)과 장남 고 구본무 회장(오른쪽)이 1999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LG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왼쪽)과 장남 고 구본무 회장(오른쪽)이 1999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LG


"몰려드는 상인들에게 제품을 나눠주고 낮 동안엔 공장에서 일하다가 밤이면 하루씩 번갈아서 숙직을 했다. 이런 생활을 4년 가까이 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자서전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 나오는 20대 후반 시절에 대한 대목이다. 부친인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이 1969년 말 별세하기 직전 40대 중반의 구 명예회장에게 "원망 많이 했제? 기업 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게 현장이다. 그래서 본사 근무 대신 공장 일을 맡긴 거다"라고 했다는 장면도 있다.

그 회고대로 구 명예회장은 당대 누구보다 현장을 잘 아는 기업가로 불렸다. 두차례의 석유파동을 극복하고 LG (87,500원 ▼100 -0.11%)그룹을 글로벌 기업의 반열로 이끈 리더십이 스스로도 현장 경험에서 나왔다고 고백하곤 했다. 그런 경험은 장남인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현장 경영수업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LG그룹의 반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술 한국 이끈 현장전문가…참 경영 효시
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구인회 창업회장((왼쪽부터),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촬영시기는 1950~1969년으로 보인다. /사진제공=LG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구인회 창업회장((왼쪽부터),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촬영시기는 1950~1969년으로 보인다. /사진제공=LG
부친 밑에서 20년, LG그룹 회장으로 25년, 모두 45년을 LG에서 보냈지만 구 명예회장의 첫 직장은 LG가 아니었다. 유림에서 존경받던 증조부 만회 구연호 공과 조부 춘강 구재서 공을 쫓아 1945년 진주사범학교(현 진주교대)를 졸업한 뒤 고향인 경남 진주시 진양군 지수면 지수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부친의 부름을 받고 '락희화학'(현 LG화학) 이사로 입사한 뒤 현장으로 돌면서 '기름밥'을 먹었다. 구 창업주가 "대장간에서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무수한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20대 교사 시절부터 굳건했던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신념이 더 단단해진 게 회장 취임 전까지 20년 동안 현장에서 쌓은 경험 때문이다. 구 명예회장은 생전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1970년부터 그룹 회장을 지낸 25년 동안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연구개발의 해', '기술선진', '연구개발 체제 강화', '선진 수준 기술개발'처럼 '기술'을 경영 지표로 내세웠다.

1970년 1월 LG그룹(당시 럭키금성그룹) 회장 취임 당시의 구자경 명예회장. /사진제공=LG1970년 1월 LG그룹(당시 럭키금성그룹) 회장 취임 당시의 구자경 명예회장. /사진제공=LG
연구 활동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중앙연구소가 설립됐다.

1979년 출범한 럭키중앙연구소는 대덕연구단지 내 1호 민간연구소다. 1985년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에어컨, 전자식 VCR, 슬림형 냉장고 등 국내 최초 제품 출시로 이어졌다. 1970년 회장 취임 당시 260억원대였던 그룹 매출은 1995년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총수 자리를 물려줄 때 30조원대로 성장했다.

"임원방 크다" 선진경영 토대 닦은 혁신가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오른쪽 세번째)이 1980년대 미국 현지생산법인(GSAI)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LG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오른쪽 세번째)이 1980년대 미국 현지생산법인(GSAI)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LG
외형성장을 넘어 질적으로 선진기업의 토대를 닦은 혁신가로도 평가 받는다. 1970년대 잇따른 기업공개로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투명경영을 이끌었다.

기업공개가 기업을 팔아넘기는 것이라는 오해가 짙었던 시절 내부 반대가 적잖았지만 구 명예회장이 나서 기업공개는 대세라고 설득했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이 민간기업으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 (1979) 등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가 모두 구 명예회장 재임 시절 이뤄졌다.

1982년 미국 알라바마주 헌츠빌에 세운 컬러TV 생산공장은 국내 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기지였다.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글로벌 유수 기업과의 합작경영으로 선진기술과 경영시스템을 습득하면서 LG그룹은 세계 무대로 지평을 빠르게 확장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987년 2월 제26차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18대 회장에 추대된 뒤 정주영 전임회장(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LG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987년 2월 제26차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18대 회장에 추대된 뒤 정주영 전임회장(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LG
구 명예회장은 전문경영인 중심의 책임경영체제를 도입하고 고객 중심 경영이념을 발표하는 등 혁신도 주도했다.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관행화 된 경영체제를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선진화된 경영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율과 책임경영을 절대절명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럭키증권(현 NH투자증권) 객장을 사전통보 없이 방문했을 때 고객들은 좁은 객장에서 불편을 겪고 있는데 임원실이 한 부서보다 큰 것을 보고 "임원방이 내 방보다 크다"고 질책했다는 일화가 회자된다.

무고승계·GS 계열분리 배경엔 인화 철학
국내 재계 첫 무고(無故)승계 선례도 구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잘 드러낸다. 구 명예회장이 만 70세을 맞아 평소 얘기했던대로 장남에게 회장직을 물려줬을 때 재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파장이 컸다.

훗날 구본무 회장이 "그룹 경영권 승계 당시 회사 깃발을 넘겨받을 때 아버지 손을 처음 만져봤을 정도로 다가가기 힘든 분이었다"고 회상했을 정도로 구 명예회장은 강건한 기업가였지만 글로벌화를 이끌기 위해선 세대교체가 필요해야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셈이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건네고 있다. /사진제공=LG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건네고 있다. /사진제공=LG
3대에 걸쳐 57년 동안 이어졌던 구씨 일가와 허씨 일가의 동업을 2000년대 초반 불협화음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데도 구 명예회장을 비롯한 양가의 가풍이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다.

구 명예회장은 생전 '사돈지간인 구씨와 허씨 집안이 평생 사이좋게 지내는 비결'에 대해 "합리적으로 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화가 온정주의라는 오해에 대해선 늘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틈날 때마다 "인화는 '한 집안이니까, 우리끼리니까 서로 봐주며 하자'는 온정주의가 아니다"라며 "사전에 충분한 합의를 거쳐 원칙을 정해놓고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결과에 대해 정확한 분배했다"고 말했다.

구 명예회장의 자서전에도 "인화는 경영의 본체인 사람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인화를 빙자해 뿌리 깊게 퍼져 있는 무사안일과 비합리적인 풍토를 없애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LG 하면 떠오르는 인화의 철학이 자칫 기업의 본질, 경쟁력 훼손으로 이어지는 것을 늘 경계했던 것이다.
고 구자경 명예회장의 75세 생일 때 찍은 가족사진. /사진제공=LG고 구자경 명예회장의 75세 생일 때 찍은 가족사진. /사진제공=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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