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파파 리더십', 베트남을 울렸다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김수현 기자, 최연재 인턴기자 2019.12.1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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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 '파파(아버지) 리더십' 통해 베트남 동남아시안 게임 첫우승 이끌어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대표팀이 10일(한국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2019 동남아시안(SEA) 게임 결승전에서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3-0으로 이기고 승리했다. /사진=로이터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대표팀이 10일(한국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2019 동남아시안(SEA) 게임 결승전에서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3-0으로 이기고 승리했다. /사진=로이터


'쌀딩크' 박항서가 베트남에 60년만의 동남아시안 게임 우승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대표팀은 10일(한국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2019 동남아시안(SEA) 게임 결승전에서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3-0으로 이기고 승리했다. 1959년 월남으로 참가해 우승했던 이력이 있지만 통일 이후 동남아 최대 종합대회인 SEA 게임 축구에서 베트남은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수석코치로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며 한국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도운 그지만 스스로는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웠다. 국가대표 경력도 상대적으로 짧고 국가대표 감독과 프로팀 감독으로서도 명장보다는 덕장이라는 평가 정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남들이 다 은퇴하는 시기인 환갑 전후로 베트남행을 택한 그는 특유의 리더십으로 연이은 우승 신화를 쓰며 베트남의 국민영웅으로 우뚝 섰다.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민간 외교에서도 박항서식 새 역사가 쓰여지고 있다. 베트남 선수들에게 파파(아버지)라고 불리는 박 감독의 리더십은 흔히 ‘파파 리더십’으로 불린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는다
축구선수 박항서의 언론 첫 등장은 1974년11월이었다. 축구 명문 경신고 재학 중이던 그는 청룡기 중고축구선수권 결승에서 연장전 승부를 펼치던 중에 결승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몸도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공격수가 아니었던 그는 스타플레이어로 불리지는 못 했다.



'쌀딩크' 박항서(60·왼쪽)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대표팀이 8일 중국 우한에서 중국 U-22 대표팀과의 경기를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과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둘은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다. 히딩크 감독이 감독, 박 감독이 수석코치였다./사진=뉴시스'쌀딩크' 박항서(60·왼쪽)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대표팀이 8일 중국 우한에서 중국 U-22 대표팀과의 경기를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과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둘은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다. 히딩크 감독이 감독, 박 감독이 수석코치였다./사진=뉴시스
길지 않은 프로선수 생활을 마친 뒤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꽃을 피운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명장 히딩크를 수석코치로 보좌하면서다. 쌀딩크라는 별명도 히딩크와의 인연을 빼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프로팀과 지역 아마팀을 이끌며 몇차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지만 2002년만큼의 영광은 찾아오지 않았다. 지도자 생활을 접을 수도 있을 때 베트남쪽에서 국가대표 감독 제의가 들어왔고 그는 이내 수락했다. 다시 한번 승부와 축구 변방 베트남을 끌어올리는데 온몸을 바치겠다는 각오가 있었던 것. 가정에서 아버지가 가족들의 변함없는 울타리가 돼 주듯 박항서는 꺾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꼰대가 아니다
선수들과의 스킨십은 박 감독이 가장 중요시 여긴 리더십 중 하나다. 규율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에도 선수들을 가슴으로 품은 영상이 화제가 됐다. 베트남 국영TV인 VTV가 찍어올린 영상에 따르면 베트남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대회에서 우승한 뒤 선수들은 박 감독의 기자회견장에 갑자기 뛰어들어왔다.

이후 선수들은 박 감독에게 물을 뿌리고 껑충껑충 뛰더니 박 감독을 잡아 흔들고 탁자도 내리쳤다. 기쁜 마음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박 감독의 얼굴과 안경에 물이 묻고, 기자회견이 잠시 중단되는 등 분위기가 애매해졌다. 하지만 박 감독은 싫은 내색 없이 선수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한 선수의 볼을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였다.


박 감독은 지난 4월 국내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처음 베트남에 갔을 때 영어와 베트남어를 할 줄 몰랐다"며 "내가 선수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킨십(육체적 접촉)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따뜻하다
지난해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 수비수 딘흐 트롱 선수가 SNS(사회연결망서비스)에 올린 8초짜리 동영상도 스킨십 리더십의 사례였다. 당시 딘흐 트롱은 '선수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감독님'이란 설명과 함께 박 감독이 발마사지기를 통해 발을 문질러 주는 영상을 게시했다.

/사진=수비수 딘흐 트롱 SNS/사진=수비수 딘흐 트롱 SNS
영상이 화제가 되자 박 감독은 "마사지하는 게 찍힌 줄 몰랐다. 의무실에 의무진이 2명밖에 되지 않아 손이 모자란다. 시합에 나갈 선수가 혼자 마사지를 하고 있어서 해줬다"면서 "소집 기간에 SNS를 금지하는데 이 친구가 동영상을 찍어 올려 많이 혼냈다"고 말했다.

지난해 화제가 된 '비즈니스석 양보'도 박 감독의 부모 마음을 잘 보여줬다. 박 감독은 지난해 12월7일 스즈키컵 결승이 열리는 말레이시아로 향하면서 부상당한 선수에게 항공기 비즈니스석 자리를 양보했다.

당시 선수들은 이코노미석을 배정받았는데, 허리 부상으로 준결승 1·2차전에 모두 출전하지 못한 도 훙 중을 마음 아파하던 박 감독이 그에게 다가가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코노미석으로 옮긴 박 감독은 비행 도중 선수들과 장난을 치며 함께 어울렸다.

아버지는 함께 뛴다
60년만의 우승을 이끌었지만 정작 박 감독은 후반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가 퇴장당해 공식 기자회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후반 32분 베트남의 공격 과정에서 미드필더 트롱 호앙이 몸싸움 중 쓰러졌다. 박 감독은 인도네시아 선수들의 거친 몸싸움에 거세게 항의했다. 이에 주심은 박 감독에게 레드카드를 꺼내 들었다.

베트남 언론 'Zing'에 따르면 박 감독은 "내 자신을 통제했어야 했는데 내가 레드카드를 받는 것보다 우승이 우선이었다"는 말을 전했다.

비록 퇴장을 당했지만 박 감독의 이런 제스처는 인도네시아가 추격의 박차를 가하던 시점에서 흐름을 끊고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행위였다. 평소에도 박 감독은 경기 내내 라인을 따라 뛰면서 선수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선수들 뒤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곤 한다.

아버지는 우리를 믿는다
박 감독은 베트남 선수들 지도를 맡기 시작할 때 몇가지 원칙과 금기 등을 공개했다. 그는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한다. 인기, 신장과 상관없이 우리라는 이름하에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식사 시간에 핸드폰을 못 쓰게 하는 것도 유명하다. 그는 “식사시간에 핸드폰을 못 쓰게 하는 이유는 선수들끼리 친해지고 어울리기 위해서”라며 “식사 시간에 주로 선수들을 관찰하는 편이다. 밥은 제대로 먹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등을 살펴보게 된다”고 전했다. 물론 식사를 마치고 훈련과 경기를 충실히 이행했다면 핸드폰 사용을 비롯해 특별한 제재를 더 가하지는 않는다.

또 박 감독은 선수들에게 몸보신에 좋은 음식을 챙기는 등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상을 보여왔다. 박 감독은 지난해 8월 가벼운 부상으로 출전 명단에 오르지 못한 선수에게 인삼을 선물했다. 또 훈련과 경기 출전 준비 등으로 바쁜 와중에도 선수들의 결혼식도 가급적 모두 참석했다.

아버지의 말 ‘덕분이다’
박항서 감독은 지난해 우승 축하금으로 받은 10만 달러(1억1345만원)를 베트남 축구발전 등을 위해 쾌척한 적이 있었다. 박 감독은 당시 “제 개인에게 주어진 축하금은 베트남 축구발전과 불우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말했다. 베트남인들의 사랑과 선수들의 헌신으로 이뤄진 만큼 나만을 위해 쓸수는 없다는 것.
60년 만에 동남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베트남 축구대표팀./사진=베트남축구협회60년 만에 동남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베트남 축구대표팀./사진=베트남축구협회
박항서 감독은 이번 60년만의 우승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응원해준 축구팬들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이번 우승은 우리를 사랑해주고 응원해준 베트남 축구팬들 덕분이다. 또한 선수들과 우리의 성공을 위해 노력해준 관계자들, 지원팀에도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오는 14일 한국(경남 통영)을 찾는다. 2020년 태국에서 열리는 AFC U23 챔피언십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영광은 잠시, 박항서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박항서 '파파 리더십', 베트남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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