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 “단결로 못 넘을 벽이 없다”…한국인 감독이 선수 심장에 새긴 베트남 정신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9.12.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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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인터뷰·방송 출연 통해 본 박항서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의 리더십…2년 내내 변하지 않는 언행 “고개 숙이지 말고 자신감”

지난 11월 7일(현지시간) 베트남 축구협회와 재계약을 체결한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사진=뉴스1<br>
지난 11월 7일(현지시간) 베트남 축구협회와 재계약을 체결한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사진=뉴스1


10일(현지시간) 동남아시아(SEA) 게임 60년 만에 첫 금메달을 딴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 대표팀의 박항서 감독은 ‘매직의 신화’를 또 한 번 쓰며 국민 영웅으로 재조명됐다. 박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베트남 축구 팬들이 행복할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베트남 국민은 ‘매직’ ‘파파’ ‘선생님’ 등 각종 극찬의 수식을 달지만, 박 감독은 여전히 겸연쩍어한다. 그리고 2년 전 베트남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을 때 말했던 내용 그대로, 이 ‘역사적인 순간’에도 어김없이 반복됐다.



“다음 경기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 “베트남 국민을 위해 이기겠다” 등이 그것.

박 감독은 이날 “이 순간 이 기쁨을 즐거워하는 모든 분과 나누고 싶다”며 “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한결같은 멘트와 태도는 2017년 이후 각종 매직을 선사할 때마다 가진 언론 인터뷰와 방송 출연에서 바뀐 적이 없다.

어쩌면 식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건조한 멘트는 하나의 진정성을 가리키는 상징이 됐고, 낯선 외국인 감독의 ‘친절한 선생님’ 같은 태도는 같은 심장을 가진 가족처럼 수용됐다.

박 감독은 무엇보다 ‘베트남 정신’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이 정신은 ‘자신감’이다. 박 감독의 통역사 르 후이가 쓴 책 ‘박항서 리더십’에서도 가장 먼저 강조하는 키워드가 ‘자신감 있게 하자’다. 박 감독은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라커룸 상황을 비춘 한 방송 매체를 통해 이렇게 얘기한다.


“고개 숙이지 마라.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나’ 자신이 먼저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승리할 수 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나 쉽게 꺼낼 수 없는, 그것도 외국인 감독이 베트남 선수에게 ‘정신’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선수들에겐 ‘낯선’ 경험이었다.

방송 인터뷰에 나선 여러 선수들도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못 넘을 벽이 없다’고 자신감을 안겨 준 감독은 처음이었다.” “자부심이라는 걸 새겨준 고마운 감독”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가 안겨준 ‘베트남 정신’의 핵심은 자부심과 함께 ‘원팀’이라는 집단 감수성이다. 박 감독은 “내가 뽑는 선수 선발 기준 중 하나가 사회성”이라며 “그래서 똑같은 선수복을 입고 함께 다니고, 똑같은 시간에 같이 밥을 먹는다”고 말한다.

박 감독이 2년 넘게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리더십의 원동력도 ‘베트남 정신’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선수들이 경기에 나가기 전 습관처럼 이렇게 전하기도 한다.

“우리 팀의 강점은 단결심이다. 단결을 잘해서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 우리는 베트남 국가대표로 섰으니, 베트남의 명예를 걸고 국민을 실망 시켜서는 안 된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U-22 축구대표팀이 지난 9월 8일 중국 우한에서 열린 중국 U-22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2-0으로 완승했다. 박 감독과 중국 U-22 대표팀을 지휘하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경기에 앞서 포옹하고 있다. /사진=뉴스1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U-22 축구대표팀이 지난 9월 8일 중국 우한에서 열린 중국 U-22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2-0으로 완승했다. 박 감독과 중국 U-22 대표팀을 지휘하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경기에 앞서 포옹하고 있다. /사진=뉴스1
그는 한국인이지만, 어떤 베트남 국민 못지않게 ‘베트남’을 위해 뛰었고, ‘베트남 국민’의 행복을 바랐고 ‘베트남 선수’를 진정으로 돌봤다.

그 일관적 태도를 설명하는 여러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낯선 외국인이라는 껍질을 벗기 위해 스스럼없이 선수에게 기대고, 부상 선수를 위해 좌석을 양보하고, 마사지도 손수 해주는 ‘파파 리더십’이 그것.

하지만 박 감독은 방송 인터뷰에서 “그런 일들이 자꾸 회자하는데, 모든 지도자가 하는 일”이라며 “그런 배려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박항서 감독은 2018년 아세안축구연맹(AFF) 챔피언십 우승을 거머쥐었을 때, 그 원동력을 ‘한국 지도자의 경험’에서 찾았다. 그는 방송 인터뷰에서 “나는 정상도 가봤고 아마추어 3부 리그에도 있었고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슬기롭고 지혜롭게 대처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모든 경기가 ‘고비의 순간’이었지만, 지도자로서 각종 경험이 베트남에서 위기를 견디는 버팀목이 됐다는 설명이다.

“베트남 국민의 기대가 크고, 절 국민 영웅으로 칭송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버거울 때가 있어요. 어떨 땐 두렵기도 해요. 하지만 그걸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요. 우리 선수들이 평균 23세인데, 이 선수들이 동남아를 벗어나 더 큰 무대에서 경험하고 그 경험을 축적해 훌륭한 선수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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