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으면, 장례는 누가"…48세 중년의 '한숨'[체헐리즘 뒷이야기]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19.12.07 06:10
글자크기

서울역 노숙인 "죽는 것보다, 죽은 뒤가 더 두렵다"…무연고 사망자 1만여명, 정책은 '깜깜'

편집자주 지난해 여름부터 '남기자의 체헐리즘(체험+저널리즘)'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뭐든 직접 해봐야 안다며, 공감(共感)으로 서로를 잇겠다며 시작한 기획 기사입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자식 같은 기사들이 나갔습니다. 꾹꾹 담은 맘을 독자들이 알아줄 땐 설레기도 했고, 소외된 이에게 200여통이 넘는 메일이 쏟아질 땐 울었습니다. 여전히 숙제도 많습니다. 그래서 차마 못 다한 이야기들을 풀고자 합니다. 한 주는 '체헐리즘' 기사로, 또 다른 한 주는 '뒷이야기'로 찾아갑니다.

사는 동안엔 외로웠더라도, 마지막 길은 따뜻하기를. 무연고 사망자를 그리 보냈다./사진=남형도 기자사는 동안엔 외로웠더라도, 마지막 길은 따뜻하기를. 무연고 사망자를 그리 보냈다./사진=남형도 기자


"나 죽으면, 장례는 누가"…48세 중년의 '한숨'[체헐리즘 뒷이야기]
지난 16일 저녁, 독자 한 분에게 메일이 왔다. 그날 오전에 나간 '공원 벤치서 쓸쓸한 죽음…마지막 길을 함께했다(11월16일자, 남기자의 체헐리즘)' 기사를 봤다고 했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다녀온 뒤 쓴 거였다. 입관을 도왔고, 추모했고, 화장해서 마지막 길을 떠나보냈다. 그 기사를 잘 봤다며 연락이 온 거였다.



그는 "48세 중년 남성이자, 평범한 직장인"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여느 주말처럼, 아침에 조깅을 하고 돌아와 우연히 기사를 봤단다. 그리고, 그의 표현을 빌리면 "다 읽고 숨이 턱 막혔다"고 했다. 누군가 얘기가 아니라, 자기 얘기가 될 것 같아서. 노원구 공원 벤치서 숨진 남성을 보고, 자기 모습이 겹쳤다고 했다.

30대에 아내와 이혼했단 그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아직은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최악의 상황이 떠오른다 했다. 집에서 홀로 떠나도, 아무도 모르는 그런 장면 말이다. "장례는 누가 치러줄까 두렵다"며 토로했다.



"죽는 건 괜찮아요, 더 무서운 건…"


"나 죽으면, 장례는 누가"…48세 중년의 '한숨'[체헐리즘 뒷이야기]


그 하소연을 듣고 알았다. 홀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단 것을. 지금은 아닐지라도, 누구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있단 걸. 그게 죽음이라면 더 그렇다는 것을. 시신 하나 수습해 줄 사람이 없을까 싶어서.


사람들 생각을 듣고 싶었다. 돌아다니며 이야길 들었다. 맘속에 품어뒀던, '불안' 하나씩을 꺼내 놓았다.

광화문역에서 만난 77세 노인은, 3년 전 아내가 떠났다고 했다. 미국에 사는 아들 하나가 있다고 했다. "그럼 장례는 걱정할 것 없지 않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건 불확실하고, 그게 두렵다고 했다. 떠나는 마당엔 삶에 큰 미련은 없겠지만, 마지막 모습은 편안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살아온 얘길 들려달라 하자, 장사를 오래 했다고 했다. 한 서너 번 망했고, 마지막엔 분식집을 했고, 지금은 그마저도 다 접었다. 그러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암 수술도 두 번 했다고 했다. 생이 치열한 만큼 죽음은 고귀하고 편하기를, "얘길 들어줘서 고맙다"며 돌아서던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노숙인 한 명은 서울역 지하도에 웅크리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으니, 바닥 냉기가 느껴졌다.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사람이면 누구나 맞는, 마지막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느냐고. 그는 "그럴 겨를이 어딨냐"고 하면서도 "솔직히 두렵다"고 했다.

그런데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은 뒤 어떻게 될까가 더 걱정된다고 했다. 길 위에 자신이 숨져 있고, 세상에 머문 흔적도 없이 치워지는 그런 모습을 상상한단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치워진다"는 표현을 썼다. 다음 순간 말없이 생각에 잠긴 그에게,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부는 제대로 된 '정책'조차 없다


"나 죽으면, 장례는 누가"…48세 중년의 '한숨'[체헐리즘 뒷이야기]


홀로 사는 이들은 점점 늘어간다. 나이와는 관계없이 자연스런 모습이 됐다. 노년은 이미 삶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길어졌다. 하지만 가족 간 관계의 끈은 더 느슨해지고 있다. 누구도 외롭게 죽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젠 그런 죽음에 대해서도 잘 고민해봐야 한단 얘기다. '무연고 사망자'는 2014년 이후 5년 6개월 만에 1만명을 넘어섰단다. 앞으론 얼마나 더 늘지 모르지만, 훨씬 더 많이 늘 거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에 비해 제도는 한없이 미비하다. 보건복지부는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다. 어디서, 얼마나, 어떻게, 왜 숨지는지 이런 파악도 못 하고 있다. 그러니 이렇다 할 정책조차 없다. 박진옥 나눔과나눔 상임이사는 "무연고 사망자 원인은 뭐고, 대책은 무엇이며, 어떤 지원을 할지가 쭉쭉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며 "전국적인 문제라면 통일된 방향성을 갖고 계획을 수립해야 하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그러니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공영장례 정책이 26개 지자체별로 제각각이다. 서울시 따로, 제주도 따로, 이렇게 개별적으로 조례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가족이 무연고 사망자로 숨졌는지 확인하려면, 이 모든 지자체를 확인해야 하는 것. 21세기에 통합된 시스템 하나 마련돼 있지 않다.

그마저도 한계가 있다. '장례' 제도란 특수성 때문이다. 장례라는 특성상 전문성이 필요하고, 긴급하게 움직여야 하는 특성이 있다. 부서를 순환하는 공무원 홀로 담당하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래서 공공 부문과 장례 업체(영리 부문)를 연결할 수 있는, 비영리 단체가 필요하다. 담당 공무원이나 장례 업체가 바뀌어도, 중간에서 전문성과 특수성, 공공성을 갖춘 중간 기관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게끔 역할을 해주는 것이란다.

이렇듯 무연고 사망자 정책이, 현재까지 미비한 이유가 뭐냐 물으니 박 이사는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시신을 위임한 가족도 민원을 안 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차라리 고독사는 냄새가 난다며 민원이라도 넣는단다.

대책이 뭘까.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공영장례는 세 가지 축으로 가야 한단다. 첫째는 가족이 장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이다. 무연고 사망자를 애초에 안 만드는 것이다. 둘째는 동반자, 지인, 보육원 친구, 사실혼 관계 등 가족 범위를 넓혀 장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4일 제도화한다고 했지만, 수반돼야 할 게 아직 많다. 마지막으론 가족도 지인도 없을 때 '시민'들이 함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박 이사는 이를 '사회적 애도'라 표현했다.

'국화꽃 한 송이'가 갖는 치유의 의미

마지막 가는 길은 너무 외롭지 않기를, 술 한 잔은 따라줄 수 있기를./사진=남형도 기자마지막 가는 길은 너무 외롭지 않기를, 술 한 잔은 따라줄 수 있기를./사진=남형도 기자

함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영장례가 된단 얘기다. 삶에서 여러 아픔을 갖고 살았던 이들이, 마지막 길을 함께 하며 치유가 되기도 한단다. 박 이사는 그러면서 그동안 그가 겪었던 일들을 들려줬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에 매번 오는 이들 중, 한 남성이 있단다. 이유가 있었다. 5년 전 그의 아내가 숨졌다. 남편은 범죄 피의자가 됐고, 조사받는 동안 아내 장례가 끝났다. 제대로 치르지 못한 게 아픔으로 남았다. 애도를 충분히 못 했고, 그게 스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못했던 걸, 다른 이들 장례를 통해 애도한다고 했다. 내가 못했지만, 다른 이들을 잘 떠나보내며 치유하는 것이다.

삼남 삼녀의 몇째였단 남성도 무연고 사망자가 됐다. 아버지 폭력을 못 견뎠고, 중학교 때 집을 나갔다. 마지막에 숨진 곳은 고시원이었다. 찾을 엄두도 못 냈던 가족들은, 그가 죽은 뒤에야 그를 만났다. 시신을 위임했는데 무슨 염치로 오겠냐며 망설이다, 어렵게 장례식을 찾았다. 어렸을 적 오빠와 친했던 여동생은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사람 살 곳이 아닌데 어떻게 살았을까, 미리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후회하면서. 그 장례 덕분에, 생애 내내 응어리졌던 마음이 풀어졌다. 애도였고, 치유였고, 다시 살아갈 힘이었다.

장례 의식을 더 하는 것, 마지막 가는 길에 국화꽃 한 송이 올리는 것, 밥 한 그릇 드시고 가라 하는 것. 그 비용이 우리 사회가 너무 부담스러워 못할 정도이고, 인색할 일일까.

상처가 난 얼굴에, 다리가 부러진 채 사망한 무연고자에게, 수의 한 벌을 곱게 입히고, 진심으로 애도하고, 따스한 유골함을 들고, 국화 꽃잎을 뿌려주고. 그 과정을 다 지켜보니 알 수 있었다. 치열하고 고단했던 삶의, 마지막 길이 왜 곱고 귀해야 하는지.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