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은 고 정 명예회장이 이끌던 1990년대 말까지 부동의 재계 1위를 지켰다. 하지만 그의 작고 이후 2000년 터진 ‘왕자의 난’을 기점으로 분리와 분가를 거듭했다. 물론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백화점 등 일부 현대 패밀리는 집안싸움과는 관계없이 분리가 끝난 상태였다. 오늘날 ‘범현대가’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분가가 아니더라도 ‘숙질의 난’ ‘시동생의 난’ 등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집안갈등이 벌어져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세상 사람들은 재벌가에서 분쟁이 벌어지면 “있는 사람들이 더 한다”고 비판을 하면서도 관음적 시선으로 은근히 즐긴다.
2002년 현대그룹으로부터 공식 분리해 출범한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오일뱅크, 현대종합상사 등을 인수하며 규모를 키웠고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 간 집안 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도 결국 현대가의 품으로 돌아왔다.
현대가 사람들은 적통 문제와 사업적 이해관계 등을 놓고 갈등을 빚거나 신경전을 펼치면서도 창업주 ‘정주영’ 이름 앞에서는 존경과 애틋함을 감추지 못한다. 느슨하거나 불편해 보이면서도 ‘정주영의 현대’라는 향수와 상징성을 매개로 특유의 결집력이 발휘된다.
이 시각 인기 뉴스
최근 가장 눈길을 끄는 범현대가의 행보는 역시 정몽규 회장이 이끄는 HDC현대산업개발그룹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다. 정지선 회장의 현대백화점그룹은 두산면세점을 품에 안았다. 재계에선 범현대가가 잃어버린 가족 찾기와 상호협력, 측면지원 등을 통해 ‘육(자동차)-해(조선)-공(항공)’을 아우르는 거대 재벌 집안으로 거듭났다는 평을 내놓는다.
HDC현대산업개발 안팎에선 벌써부터 범현대가 기업들과의 지분투자, 사업적 제휴 등 논의가 한창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정씨 일가 연합군의 교감과 지원사격을 전제로 한 분석이다.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협업과 측면지원의 가능성은 농후하다.
고 정 명예회장 슬하 9남매와 일곱 동생의 후손들은 이미 3세 경영을 본격화하고 있다. ‘아산’을 뿌리로 한 현대 패밀리들의 행보는 앞으로도 세대를 초월해 언제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상징적으로 HDC현대산업개발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계기로 범현대가 기업의 임직원과 가족들이 누가 뭐라지 않아도 ‘아시아나 비행기만’ 타는 불문율이 생길 수도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