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② 지은이 이지은의 시 다섯

김겨울, 김소미, 임현경, 전연주, 강명석 ize 기자 2019.12.0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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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의 노래를 듣는다면, 어느 순간 반드시 그의 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인생의 한 시점에서 자신에게 깊은 기억을 남긴 아이유의 가사 다섯.
아이유│② 지은이 이지은의 시 다섯


‘싫은 날’
한 겨울보다 차가운 내 방 손 끝까지 시린 공기
봄이 오지 않으면 그게 차라리 나을까

무엇도 뜻대로 되지 않고, 아무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고, 온통 막막하기만 한 날, 그래서 집의 고요가 무섭게 다가오는 날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왠지 바람이 더 차게 느껴지는 그런 날에는 고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몇 번을 맴돌다 겨우 들어간 집의 적막을 참을 수 없어 사람의 목소리를 크게 틀어둔다. 잠시나마 위안이 되는 듯도 하지만 그도 잠시뿐, 잠에 들기 위해서는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한다. 턱 끝까지 올라오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꾹꾹 삼키며 무릎을 끌어안는 추운 겨울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추위에 차라리 익숙해지는 날들. 누구에게나 있는 이런 ‘싫은 날’을 아이유는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그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거나 지금도 있을 테고, 아마 그 외로움은 그가 유명한 만큼이나 강렬할 것이다. 유명세가 한 개인에게 어떤 공허함을 가져다주는지 생각하면 가사는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여러 곡들 사이에서 조용히 웅크려 있는 이 곡이 유난히 눈에 띄는 건 그 때문일까.
글. 김겨울(유튜브 채널 '겨울서점' 운영자)

‘스물셋’
그 무엇도
거짓이 아니라는 말




“맞춰 봐. 어느 쪽이게?”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과시한 미니앨범 ‘챗셔(CHAT-SHIRE)’의 타이틀곡 ‘스물셋’에서 아이유는 스타이자 아티스트, 그리고 젊은 여성으로서 여러 자아가 힘겨루기 중인 내면을 고백하고 있다. 뮤직비디오 역시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아이쿠!”('좋은 날')로 정점을 찍은 이른바 ‘국민 여동생’으로 불렸던 캐릭터를 스스로 패러디하는 식이다. “다 큰 척해도 적당히 믿어줘요. 덜 자란 척해도 대충 속아줘요”라는 말속엔, 어른과 소녀의 성질을 동시에 어필해야만 했던 여성의 피로감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아이유는 세상의 모순과 교란 앞에서 “때려치고 싶어요”, “돈이나 많이 벌래”라고 도발 아닌 도발을 시도한다. 이 자가당착의 가사는 자신의 성적 대상화를 조망하는 아이유의 뿔난 목소리인 동시에, 세간의 기대에 부응해 사랑받고 싶은 욕망도 외면하지 않아서 더욱더 생생하다. 그 끝에서 그는 “사실은 나도 몰라. 애초에 나는 단 한 줄의 거짓말도 쓴 적이 없거든”이라고 대답한 뒤 유유히 사라진다. 들끓는 나의 자아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으며, 그러니 아무것도 거짓은 없다고. 세상이 캐묻는 음흉한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지 않기로 한 소녀는 어른이 되어 미래로 나아간다. 이 명료한 선언을 적기까지 아이유에겐 얼마나 많은 성찰과 용기가 필요했을까. 이십대 초반, 인기의 최정점에 오른 여성 가수가 스스로 짚어낸 질문은 그때도 지금도 시의적절하고, 한편으로는 더 아프게 다가온다.
글. 김소미(‘씨네21’ 기자)

‘팔레트’
I like it I'm twenty five
날 좋아하는 거 알아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새 학년 첫 등교 날, 영어 학원 첫 수업, 대학교 OT……. 살면서 종종 자기소개를 요구받을 때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이상해보이지 않을까를 고민하며 이름과 취미 정도를 읊곤 했다. 취직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쓸 때조차도 암묵적인 규칙을 충실히 따르며 합격을 만들어내기에 바빴을 뿐 온전한 ‘나’를 소개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듣게 된 ‘팔레트’에서 아이유는 진한 보라색과 반듯이 자른 단발머리, 단추 있는 파자마와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스물다섯 살의 자신을 분명히 소개한다. 좋다 밉다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서있음에도. 그는 보여지는 것보다 직접 자신을 바라보고 또 모두에게 보여주기를 택한다. 스스로 이제 조금 알 것 같다고, 아직 할 말이 많다고 선언하는 아이유의 노래는 타인의 시선을 체화하느라 마주할 수 없었던 과거와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기자가 된 지금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흐릿해질 때, 나보단 나를 둘러싼 시선들을 더 의식하게 될 때면 이따금씩 ‘팔레트’를 찾아듣는다. 이 곡을 부를 때에도 그 이후에도 자신의 색을 촘촘히 채워넣고 있는 아이유를 떠올리면, 그의 가사처럼 ‘정말로 괜찮은(I'm truly fine)’ 기분이 든다.
글. 임현경

‘이름에게’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그때 나는 입사 1년차 조연출이었고, 음악 시상식은 처음이었다. 내 역할은 보조출연자 스탠바이였는데, 수많은 이름들을 기억한단 그의 무대 콘셉트에 맞게 수십 명의 보조출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운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리허설이 지연되자 온갖 민원이 나에게 쏟아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대 위로, 대기실로, 그 넓은 고척돔을 무작정 뛰었다. 마침내 모든 출연자들이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줄을 서고 손에 든 조명을 켰다. 수많은 이름들을 배경에 띄우고,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꾸며 호평받았던 그날의 무대. 그 깜깜한 뒤편에서, 임무를 마친 내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놓고 처음으로 가사를 들었다.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그날 내가 맡았던 일은 무대 전체의 비중을 보았을 때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거였다. 사실 일을 시작한 지 1년도 안된 때에, 폐만 끼치지 않아도 다행이었다. 그 무력감 탓인지 어딘가에 내가 있다는 걸 안다는 그 가사가 오래도록 마음에 박혔다. 타인의 삶을 모두 상상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겠다는, 외치겠다는 말이 마음을 보듬었다. 늘 서러웠던 사회 초년생의 기억이다.
글. 전연주(MBC플러스 PD)

‘시간의 바깥’
긴긴 서사를 거쳐 비로소 첫 줄로 적혀
나 두려움 따윈 없어


앨범 가사지의 ‘한 겨울보다 차가운 내 방 손 끝까지 시린 공기 봄이 오지 않으면 그게 차라리 나을까’(‘싫은 날’)를 읽는 순간 되돌아보기 싫었던 과거의 상처가 기억났다. ‘감히 이 마음만은 주름도 없이 여기 반짝 살아있어요’(‘마음’)을 하염없이 반복해 들으면서 몇 십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 밤’(‘밤편지’) , 그 두 글자가 언젠가부터 불면의 밤을 버티게 만드는 안식처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생각나는 맨 첫 줄의 노래이자 가사는 아이유가 ‘두려움 따윈 없이 비로소 첫 줄로 적힌' 순간이다.

‘좋은 날’과 ‘너랑 나’를 부르던 그때에도 아이유는 종종 자신이 자리한 순간을 과거시제로 만들고, 마치 인생을 한 번 더 사는 것 같은 사람의 시점에서 그 많은 지나간 감정, 전하지 못했던 말들을 대신 꺼내주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노래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지나간 순간들을 표현 가능한 언어와 노래로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유가 현재로 소환한 과거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는 성인이 됐음에도 어떤 사람들에겐 때론 무엇이든 아는 아이처럼 여겨졌고, 때론 지나치게 영악하고 멘탈 강한 아티스트처럼 이해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과거의 노래들이 쌓이고 쌓여 그의 역사가 된 이 지금, 아이유는 비로소 다가올 시간 속의 자신을 말한다. 지나온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나, 과거에 대한 이해의 깊이 대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세상에서 첫 줄을 적는 나. 긴긴 과거의 서사를 지나 ‘드디어’ 현재로 온 사람의 눈물나는 환희의 순간. 그 뒤에는 불안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 알 수 없는 미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아이유의 시간이다. 그러니, 그 많은 과거들을 아이유의 목소리로 용서받고자 했던 사람으로서, tvN ‘호텔 델루나’의 이 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언젠가 당신의 시간이 흐르길 바랍니다”
글. 강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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