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현지시간) 별세한 존 그콩웨이 JG서밋홀딩스 회장. /사진=AFP
고콩웨이 회장의 삶은 다사다난했던 아시아의 근대역사처럼 파란만장했다. 1870년대 가난을 피해 중국에서 필리핀 세부로 이주한 증조할아버지가 세부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성공한 덕분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고콩웨이 회장은 곧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된다.
다행히 자신은 삼촌에게 몸을 의탁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와 나머지 다섯 형제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설상가상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삼촌의 사업마저 몰락하면서 고콩웨이 회장은 말 그대로 빈털터리가 된다.
이후 자전거를 산 고콩웨이는 인근 마을로 사업 범위를 넓혔으며, 남동생 헨리가 세부로 돌아오자 함께 레이테와 보홀 등 인근 섬으로 물건을 팔러 다니기 시작한다. 한번은 세부에서 마닐라로 가던 중 배가 뒤집혀 팔려고 실었던 고무 타이어를 붙잡고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전후 진행된 재건 사업은 고콩웨이 회장이 큰 성공을 거두는 발판이 됐다. 무역회사를 설립한 고콩웨이 회장은 미국에서 원자재와 물건을 수입해 큰 이문을 남겼다. 중국에 있던 나머지 가족을 모두 필리핀으로 불러들일 정도였다.
이 시각 인기 뉴스
31세가 된 고콩훼이 회장은 무역으로 번 돈을 식품사업에 투자했다. '유니버설 콘 프로덕트'라는 회사를 세워 옥수수전분부터 맥주 원료, 라면, 후추 등을 생산했다. 필리핀 대표 맥주회사 산미구엘이 그의 최대 고객이었다.
생전 자신이 설립한 세부퍼시픽항공 여객기 앞에서 아들인 랜스 고쿵웨이(왼쪽)와 함께 포즈를 취한 존 고쿵웨이 JG서밋홀딩스 회장. /사진=AFP
고콩웨이 회장은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사회공헌에도 적극 나서면서 필리핀 국민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 특히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80세 때 이미 자산의 상당 부분을 고콩웨이형제재단에 기부해 다양한 장학 사업을 진행했다. 필리핀 매체 필스타는 "고콩웨이 회장은 '빅 존(Big John)'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지만, 그것은 그의 큰 몸집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인생을 걸고 이룬 성과 때문"이라고 추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