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처럼 부자나라 된, 아프리카의 무인도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2019.11.11 06:30
글자크기

[이재은의 그 나라 모리셔스 그리고 다인종 국가 ②] 1968년 독립당시 1인당 GDP 200달러 빈국… 2018년 1인당 GDP 1만1238달러, 아프리카의 부국으로

편집자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사진=모리셔스 관광청/사진=모리셔스 관광청


싱가포르처럼 부자나라 된, 아프리카의 무인도
아프리카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섬 나라, 모리셔스는 다양한 모습으로 알려져있다. 꿈의 신혼여행지, 조세회피처, 아프리카의 부국… 그중 아시아인으로서 가장 와닿는 건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라는 설명이다.



모리셔스는 싱가포르와 데칼코마니라고 할 정도로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섬나라로서 오랜 기간 무인도였다가 이민을 통해 대량의 인구가 짧은 시간 내에 이주했으며,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지도자를 필두로 빠른 발전을 지속해 각 지역을 대표하는 부국(富國)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 등이 그러하다. (☞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참고)

현재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부국이다. 면적(2040㎢)은 제주도(1848㎢)와 유사하고 인구는 120만 정도에 불과하지만, 지난해 1인당 GDP가1만1238달러를 넘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잘 사는 국가다. 하지만 모리셔스는 불과 300여년 전까지만해도 도도새만 가득한 무인도였다.



◇도도새 가득했던 무인도에서, '사탕수수의 섬'으로
싱가포르는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 관심 밖 버려진 섬으로, 극소수의 말레이족(원주민, Bumiptra·부미뿌트라)만 살던 해적들의 은거지였다. 하지만 1819년 이 곳의 위치적 중요성을 파악한 영국 동인도 회사가 현 싱가포르 남부에 항구를 개발하고 동방무역 거점으로 키우면서 서서히 사람이 몰려들었다.

모리셔스도 대부분의 역사에서 무인도로 남아있었다. 모리셔스가 발견된 건 10세기경, 말레이족과 아랍인들에 의해서다. 하지만 이들은 모리셔스에 큰 관심이 없었고, 섬은 무인도로 존속됐다. 모리셔스의 포식자는 사람이 아닌 도도새였다. 별다른 천적이 없었던 도도새는 생존의 핵심 역할을 하는 날개를 포기한 채 육지 생활을 이어갔다.
멸종된 도도새 /사진=위키커먼스멸종된 도도새 /사진=위키커먼스
하지만 16세기 초 개시된 유럽인들의 인도양 항해와 함께 모리셔스 개발과 식민이 진행됐다. 도도새는 1505년 이후 시작된 인간의 본격적인 사냥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도도새는 결국 인간이 섬에 첫 발을 들인 뒤 약 100년 만에 멸종됐다. 1662년 마지막으로 목격됐으며, 그때부터 1693년 사이에 멸종됐다.

도도새의 멸종과 함께 모리셔스의 변화도 가속화됐다.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열강은 돌아가면서 모리셔스를 점령했다. 이 과정 모리셔스라는 이름도 생겼다. 1598년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Maurits)가 이 섬을 식민지로 만든 뒤 그의 이름을 따서 모리셔스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모리셔스 섬에 이름을 줬지만 악랄하게 자연 환경도 파괴했다. 그들은 1638년부터 본격적으로 마을을 만들고 1710년까지 섬에 정착하며 자바(현재 인도네시아 영토)에서 사탕수수를 들여와 재배를 시작했다.

이들은 사탕수수 밭을 일궈 럼주를 만드는 등 열대삼림을 파괴하고 모리셔스를 일궈나갔다. 수출을 위해 흑단 나무를 남벌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인들의 삼림파괴로 현재 모리셔스의 저고도 평지는 사탕수수밭과 함께 사바나(열대 초원)와 같은 자연경관을 보이게 됐다. 이후 네덜란드인들은 풍토병이 닥쳐오자 도망치듯 섬을 빠져나갔다.

◇1968년 1인당 GDP 200달러→ 2018년 1인당 GDP 1만1238달러
빈 자리를 채운 건 프랑스였다. 1715년 프랑스는 모리셔스에 '프랑스 섬'(일드 프랑스·Ile de France)이란 이름을 붙이고 지금의 수도인 포트루이스를 거점으로 섬 전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기존에 남아있던 숲을 갈아엎고 더 큰 사탕수수 농장을 개간했다. 그리곤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와 인도계 자유민(Malabares)을 데려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공고히했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모리셔스산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을 주요 무역품으로 해서 성장했다.

프랑스가 약 100여년 지배하면서 현재까지도 모리셔스 곳곳에는 프랑스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늘날 모리셔스의 지명은 대부분 불어로 남았고, 불어는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된다.

이후 모리셔스를 점령한 건 영국이다. 영국은 1814년 파리조약으로 모리셔스 지배의 바통을 넘겨받았고, 섬은 이때부터 영어명 '모리셔스'로 불리게 됐다.

영국의 지배 기간 동안 모리셔스의 인구구성도 달라졌다. 1835년, 최후의 식민종주국인 영국은 주민의 7할에 달하는 노예를 해방시켜 백인과의 차별을 금지했다. 동시에 이로써 초래된 노동력의 부족은 45만명에 이르는 인도인의 계약 이민을 통해 해결했다.

이후 모리셔스는 지속적으로 인도, 아시아에서 계약 이민자들을 대거 받아 노동력을 대체했다. 적지 않은 중국계도 먼 바다를 건너 모리셔스에 상륙했다. 150여년간의 영국 지배 끝에 1968년 3월 모리셔스는 독립국이 됐다.
/사진=모리셔스 관광청/사진=모리셔스 관광청
영국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모리셔스는 사탕수수 수출을 주요 산업으로 하는 다인종으로 구성된 이민사회를 형성하게 됐다. 모리셔스는 현재 약 135만명의 인구 중 약 68%가 인도계이고, 아프리카계의 크레올(혼혈인 포함)은 27%, 중국계 3%, 프랑스계 2% 등으로 다인종 국가다.

처음 모리셔스가 독립을 맞았을 때의 상황은 암담했다. 모리셔스는 새로 이민온 이들만 바글대는,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인종갈등이 예견되는 섬이었다. 1968년 1인당 GDP가 200달러에 불과한, 특별한 산업 없이 설탕 수출로 먹고 사는 빈국(貧國)이기도 했다. 당시만해도 모리셔스는 경작지의 90%에 사탕수수를 재배했고 전체 수출의 96%를 설탕이 책임졌다.

신생 독립국이자 빈국 모리셔스는 후에 모리셔스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게 된 시우사구르 람굴람 경(SSR·Sir Seewoosagur Ramgoolam·1961~1982년 초대총리)과 함께 혹독한 생존기의 역사를 쓰게된 것이다.

이는 영국 식민지에서 말레이시아에 편입됐다가, 1965년 8월 신생 독립국으로 출범한 뒤 싱가포르 초대 수상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리콴유(李光曜·1959~1990년 총리, 1990~2004년 선임장관, 2004~2011년 내각고문)를 필두로 아시아의 대표적 부국(富國)이 된 '다인종 국가' 싱가포르와 상당히 유사한 흐름이다. (☞"아시아 국가는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②] 참고)

싱가포르 역시 1965년 독립 당시만 해도 1인당 GDP가 500달러 남짓으로 국가 존립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싱가포르는 아시아 최대 부국으로 성장했다. 싱가포르의 지난해 1인당 GDP는 6만2000달러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다.

◇완전 개방시장경제체제에 국운(國運) 걸었다

두 나라는 좁디좁은 국토에 자원도 고급 인력도 거의 없었다. 제주도 면적의 국토에 약 120만명이 살고 있는 모리셔스는 세계적 인구 조밀국가로 세계에서 17번째로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인다. 싱가포르 역시 마찬가지다. 싱가포르도 서울의 약 1.2배 크기 국토에 인구는 561만명이 몰려있는 대표적 인구 조밀 국가다.

두 국가는 대외적으로 완전 개방 체제를 만들어 해외 자본 유치에 국운을 걸었다.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국가 시스템을 바꿔왔다.
모리셔스 수도 포트루이스 전경 /사진=위키커먼스모리셔스 수도 포트루이스 전경 /사진=위키커먼스
물론 두 국가가 처음부터 이 같은 체제를 지향했던 건 아니다. 싱가포르는 독립 초기, 한국이나 대만 등 신생 독립국들이 그러했듯 수입을 대체하는 국내 산업 육성에 관심을 가졌다. 이렇다 할 생산 기반이 없으니 먼저 수입품의 국내 생산 기반 마련에 초점을 둔 뒤 기술력을 함양하고 자본을 축적해 다시 수출에 나서는 수출 주도형 공업화 방식이었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을 통제하는 보호무역 정책도 실시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적은 인구로 내수 중심의 경제 성장을 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하고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통해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모리셔스도 초기엔 시장 개방이나 3차 산업으로의 전환 등엔 관심이 적었다. 독립 초기 모리셔스는 값싼 노동력을 토대로 섬유의류 가공무역에 주력하며 1973년부터 1999년 사이 실질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5.9%에 이르는 등 눈부시게 성장했다.

하지만 실질 경제성장률이 2000년대 들어 2%대로 떨어지는 등 곧 노동집약적 산업의 한계를 맞닥뜨렸다. 이에 모리셔스는 3차 산업 중심의 경제구조로 변화를 꾀하고, 시장 개방을 위해 파격적인 외자유치 정책을 시도했다.

두 국가는 이제 남부럽지 않은 지역내 대표 부국이다. 싱가포르는 세계경제포럼(WEF) 선정 인프라부문 경쟁력 2위 국가(2016~2017년), 1인당 명목 GDP 세계 9위 국가(2018년 IMF 발표), 보아오 포럼 선정 아시아 경쟁력 1위 국가(2017년) 국가로 꼽힌다. 무역은 국내 총생산의 3배를 훨씬 넘고, 외국인 투자가 총 국내 투자의 70%를 차지한다.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기업도 6000여개를 넘는다.

모리셔스도 마찬가지다. 1인당 GDP가 200달러에 불과했던 빈국 모리셔스는 이제 1인당 GDP 1만1238달러인 아프리카 대표 부국으로 성장했다.

모리셔스의 GDP는 1977년과 2009년 사이 연평균 5.1%씩 증가했다. 세계경제포럼(WEF) 선정 아프리카의 최대 경쟁력 국가로 꼽혔고,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과 월스트리트저널이 꼽는 '경제자유지수'에서도 2015년 아프리카 1위 국가로 뽑혔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 첨단 전자분야의 다국적 기업을 비롯해 만여개 달하는 외자기업도 진출해있다.

◇3차 산업 중심의 관광 허브로…

두 나라의 야심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두 나라는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IT) 중심 국가로서 21세기형 지식 기반 산업의 중심지로 거듭나겠다는 야심을 갖고 이를 위해 노력 중이다.
/사진=모리셔스 관광청/사진=모리셔스 관광청
그동안 모리셔스 경제의 핵심은 제조업(임가공), 관광업 및 금융서비스업, 농업(설탕) 등이었다. 하지만 최근 모리셔스 정부는 3차 산업 중심의 경제구조로의 전환을 목표로 두고 교육, 통신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도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IT) 중심 국가를 건립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첨단 기술을 보유한 다국적 기업을 유치해서 싱가포르에서 세계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엔 아시아의 관광 허브로 도약한다는 목표도 포함돼있다.

두 나라의 야심을 뒷받침하는 건 높은 교육열이다. 모리셔스 국민의 높은 교육열은 유명한데, 대부분의 국민이 영어와 프랑스어 두가지 언어를 어릴 때부터 공부해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모리셔스인의 94%는 고등교육을 이수했고 문맹률이 거의 없는데, 이는 고등학교 과정까지가 의무교육으로 모든 교육비가 정부에서 제공이 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혹독한 경쟁체제를 통한 높은 교육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전국 학생 성적을 일간지에 공개하는 등 극단적인 경쟁 체제를 도입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게 소수의 엘리트들을 키워내는 데 기여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NUS), 난양공과대학(NTU), 싱가포르 경영대학(SMU) 등은 전세계 손꼽히는 명문대다.

두 나라 모두 관광 허브로의 도약 부문에선 이미 어느 정도 성공했다. 아름다운 해변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모리셔스에서 관광산업은 제3의 외화수입원이다. 모리셔스의 연간 관광객 수는 1994년 40만명, 2004년 72만명 등이었다가 2014년 처음으로 관광객 100만명을 돌파했고, 2016년엔 127만명을 기록했다.

싱가포르 역시 관광산업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싱가포르는 빌딩 숲 사이의 야경, 스카이라인, 빼어난 자연환경 등으로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2005년에는 카지노 산업을 위해 도박을 합법화시키는 등 관광산업 진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데, 2013년 한해만 150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

참고문헌
아프리카 사회통합 모형 구축을 위한 마다가스카르와 모리셔스의 다종족사회 비교분석, 국제지역연구, 한양환
KOTRA 모리셔스 국가정보(나이로비 무역관)
리콴유-작지만 강한 싱가포르 건설을 위해, 살림출판사, 김성진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