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처음 '땡땡이' 쳐봤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19.11.02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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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르던 아침 먹고, 영화보며 울고, '막춤' 추고…반복되던 일상의 균열, '로망'은 거창한 게 아녔다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회사를 땡땡이 친 기분을, '막춤'으로 표현해보았다./사진=남형도 기자의 방 창틀에 카메라 올려놓은 셀카.회사를 땡땡이 친 기분을, '막춤'으로 표현해보았다./사진=남형도 기자의 방 창틀에 카메라 올려놓은 셀카.


회사를 처음 '땡땡이' 쳐봤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때는 오전 7시25분. 평소 같음 광화문에 다다랐을 그 시간에, 난 집에 있었다. 팬티에 편안한 니트를 입은 이상한 차림으로. 머리는 양 옆이 눌려 까치집이 됐고, 안경도 벗고 있었다. 그렇게 거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메시지를 정성스레 다듬고 있었다.



'부장, 오늘 아파서 회사에 못 갈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건 좀 성의가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 다시 바꿨다. 회사를 못 가서, 안타까운 마음을 한 스푼 더 넣어서.



'부장,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아무래도 출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쉬어도 괜찮을지요? 죄송합니다.'

아까보단 나아졌다. 근데 써놓고 보니 아무래도 절박함이 떨어져 보였다. 좀 더 구체적인 병명이 필요했다.

'부장,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아무래도 출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몸살에 장염이 겹친 것 같습니다. 오늘 연차를 내고 하루 쉬어도 괜찮을지요? 죄송합니다.'


여기에 죄송함을 한층 강화하는 '점(.)' 몇 개와, 울음 표시(ㅠㅠ)를 추가했다. 다 써놓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답장을 보기 무서워, 나도 모르게 '야간 모드'로 바꿨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소파에 던진 뒤,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며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다스려보기로 했다.

회사 땡땡이를 치기 위해, 부장에게 정성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주저하고, 고민하고, 지우고 또 쓰고를 반복했다. 다음날, 양심고백을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스마트폰 캡쳐회사 땡땡이를 치기 위해, 부장에게 정성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주저하고, 고민하고, 지우고 또 쓰고를 반복했다. 다음날, 양심고백을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스마트폰 캡쳐
회사를 '땡땡이' 치고 있었다. 몸살과 장염은 순 거짓부렁이었다. 난 너무 멀쩡했다. 그저 회사에 가기 싫었을 뿐.

이유는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

직장인도 어느덧 9년 차, 땡땡이를 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빠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아파도 회사 가서 아파야 한다"고. 가끔 노트북을 보고 인상을 쓰며(일에 집중하는 것처럼) 딴짓을 한 적은 있다. 그래도 전반적으론 소처럼 우직하게 해왔다. 편안한 것보단, 바쁜 게 맘이 더 편했다. 내가 쓰임이 덜 하단 생각이 들면 금세 초조해졌다. 그래서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살았다.

몸과 마음이 지친 게 느껴졌다. 올해도 11월, 한해 쌓인 묵은 피로다. 반복되는 일상이 조금 지루해졌다. 알람 5개에 애써 잠을 깨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양치질을 하고, 버스 시간을 맞추느라 뛰고, 사람들 틈바구니서 시루떡이 되고, 운 좋으면 앉아서 졸고. 익숙한 책상 의자에 앉아 노트북에 멍하니 시선을 두고, 흡사 정지된 흑백화면 같은, 그렇지만 시간은 또르르 잘 흘러가는 그런 하루를 보내곤 했다.

막연히 다른 하루를 그리워했다. 회사를 그만둔다면 보내고픈 24시간이랄까. 영화 쇼생크 탈출서 20년간 감옥에 갇혀 있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탈옥한 뒤 해안도로를 달리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건 일종의 '로망(낭만)' 같은 거였다. 상상하면 미소가 머금어지는. 그러나 언젠가, 먼 훗날이란 말로 한참 미뤄뒀던.

스산해진 가을, 쌓인 낙엽을 밟으며 문득 돌아보니, 나를 위한 건 '그러려니' 다 참고, 미뤄두고 참 인색했었다. 화장실에서 흰 머리 하나를 발견하고 뽑다가, 괜스레 처량해졌다. 20대엔 흰 머리가 보이면 "야, 이거 봐" 하고 자랑했는데, 이제 30대 후반이라 그런 것인지, 시간은 고생했다고 그 품을 넉넉히 내어주지 않으니까. 어느 날 문득 앗아가 버리기도 하니까. 그런 생각이 내 마음에 자그마한 균열을 냈다.

그래서, 2019년 나를 위한 선물이라 여기고, 회사를 땡땡이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하루를 로망으로 채우기로. 언제? 롸잇 나우!(지금 당장).

모처럼 아침 하늘을 봤다
아침에, 가을 하늘이 보고 싶었다. 참 오랜만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아침에, 가을 하늘이 보고 싶었다. 참 오랜만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지난달 30일,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적당한 땡땡이 사유가 필요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갑자기 회사에 안 가도 될 이유가 없었다. 첨엔 용감하게 '부장, 회사 가기 싫어서 하루 쉬겠습니다' 할까 하다가 말았다. 월급이 그리 호락호락 나오는 게 아녔다. 그래서 결국 아프다고 했다. 그걸 쓰는 데에만 무려 30분이 넘게 걸렸다. 문장을 썼다가 또 지우고, 고쳤다가 또 지우고.

보내고 나니, 곧 부장에게 답장이 왔다. "몸 관리 잘하고, 연차 신청만 올려달라"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오늘은 생각 안 하기로 했다. 곧 밝혀지긴 할 테니. 보고까지 하고 나니 비로소 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스르르 녹았다.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은 파랗고, 잎사귀는 노랗고 불그스름했다. 어느새 가을이었다. 아침에 하늘을 길게 올려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출근할 땐 앞만 보고 걷기 바쁘고, 돌아올 땐 이미 어둑어둑하니까. 주말엔 밀린 잠을 몰아서 자기 바빴으니까.

'째깍째깍', 항상 분초를 재촉하던 거실 시계 소리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사방은 고요했고, 코끝에 오가는 숨은 깊어졌다. 멍하니 초점이 나갔다. 몸을 그리 잠시 가만히 뒀다. 모처럼 느리게 가는 시간을 만끽했다.

일탈도 정답을 찾으려고
회사 땡땡이 친 기념으로, 불금에만 입는 빤쭈(팬티)인데 특별히 착용해봤다./사진=들뜬 남형도 기자회사 땡땡이 친 기념으로, 불금에만 입는 빤쭈(팬티)인데 특별히 착용해봤다./사진=들뜬 남형도 기자
귀한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했다. 짜릿한 일탈이랄까. 으레 그렇듯 일상과 아예 동떨어진 것들이 떠올랐다. 번지점프를 하러 간다거나, 바다로 훌쩍 떠난다거나, 말도 안 되게 비싼 음식을 먹는다거나 그런 것들. 일단 노트에 쭉 써 내려갔는데, 어쩐지 흡족하진 않았다.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하는 상황이 됐다. 자우림의 일탈 노랠 들으니,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이란 가사가 들렸다. 잠시 상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검색을 해보고, 도움이 될만한 것들도 찾아봤다. 그러다 어쩐지 우스워졌다. 일탈마저도 '정답'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는 게. 그리 정답 같은 삶을 살아왔고, 그게 싫어 회사를 하루 땡땡이쳤음에도.

그리 내 마음도 잘 모르고 살았다. 그냥 내가 원하는 하루면 족했다. 그래서 온전히 마음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바삐 보낸 하루에 침전돼 허우적대던 나는, 어떤 하루를 보내고 싶었는지. 잘 보이고 싶은 좋은 하루가 아니라, 잘 보내고 싶은 좋은 하루. 마음을 다시 먹으니 한결 편해졌다.

그렇게 하루 계획표를 세웠다. 회사에서의 팀장, 좋은 남편, 의젓한 아들 같은 역할은 거기에 없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계획이었다.

뱃살에 '자유'를 허하노라
청청 패션은, 아무나 입으면 안 된다는 걸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자마자 알게 됐다./사진=남형도 기자 셀카청청 패션은, 아무나 입으면 안 된다는 걸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자마자 알게 됐다./사진=남형도 기자 셀카
나갈 채비를 했다. 따뜻한 물로 정성스레 샤워를 하고 나왔다. 원래는 '불금'에만 입는, 빨간 빤쭈(팬티의 다소 귀여운 표현)를 입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뭘 입을지 고민하다 청바지를 입었다. 평소 하던 벨트는 빼버렸다. 튀어나온 배를, 늘 가둔 뒤 출근했었다. 그게 예의라 생각했을지. 그리고 나도 모르게 힘을 주고 지냈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배가 빨갛게 됐다. '너도 살아내느라 고생했다', 이따금씩 배를 쓸어내리며 위로를 했다(이상함). 그래서 오늘만큼은 뱃살에 자유를 허락하기로 했다. 숨도 편히 쉬기로.

위에는 청남방을 입었다. 소화하기 힘들다는 '청청 패션'이었다. 배우 강동원 정도만 잘 소화했던 게 기억나, 단추를 잠그다 멈칫했다. 거울을 보고 중단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냥 다 입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정신승리를 했다. '세상이 날 보고 비웃을 때, 난 누구도 보지 않겠다.' 다 입고 거울을 봤다. 나도 모르게 눈을 깔았다. 역시 '패완얼(패션의 완성은 얼굴)'이구나.

머리의 가르마도 하지 않았다. 평소엔 드라이기로 대충 말리고, 뭐 바르지도 않았었다. 바쁘니까. 그렇게 1분 만에 머리 손질을 끝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앞머리를 내리고, 머리 손질을 해보기로 했다. 머리를 말리면서 손가락을 구부려 뽕을 넣었다. 젖었을 때 하는 게 핵심이다. 안 하던 걸 하려니, 머리가 눈을 찔러 잠시 울었다. 어쨌거나 15분 정도 손질하고 왁스까지 발랐다. 1.5살 정도 어려 보였다, 만족!

'똘이'와 '동네 고양이'
동네 고양이 겨울집을 만들어줬었는데, 집에 쏙 들어가서 쉬고 있는 걸 보니 맘이 어찌나 따뜻하던지./사진=남형도 기자동네 고양이 겨울집을 만들어줬었는데, 집에 쏙 들어가서 쉬고 있는 걸 보니 맘이 어찌나 따뜻하던지./사진=남형도 기자
바깥에 나와 처음 간 곳은 '똘이네 집(처가인데, 똘이가 사니까 그렇게 부른다)'이었다.

똘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끄러미 날 바라봤다. '월급 노예야, 이 시간에 네가 어인 일이야?' 이런 표정이었다. 그것도 잠시, 보송보송한 털발로 뛰어나와 무척 반겼다. 늘 많이 못 놀아줘 미안한 맘이라 오래도록 쓰다듬어줬다. 옥시토신(애정 호르몬)이 마구 분비되고 있었다.

'무서운 듯 도망가기 놀이'와 '숨바꼭질'을 하며 놀아줬다('4살 똘이와 하루를 보냈다' 지난해 11월17일자 기사 참조). 금세 웃는 똘이를 보며 마음이 몽글몽글 동그랗게 됐다.

그리고 나와 동네 고양이를 만나러 갔다. 지난 9월, 겨울용 집을 만들어줬었는데 잘 있는지 주기적으로 살피고 있었다.

살금살금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려 하는데, 동네 고양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집안에 들어가 있는 건 처음 보는 터라, 무척 신기했다. 괜히 겁을 먹을까 싶어 조심조심 뒷걸음질 쳐서 돌아 나왔다. 혹시나 안 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고마웠다. '우와, 우와'하고 혼잣말하면서, 헤벌쭉 웃으면서 신바람이 나서 걸었다.

아침 식사를 했다, 맛있게
평소 바빠 아침밥을 못 먹는 날 위해, 이날만큼은 돼지불백 맛집을 찾아갔다. 아침엔 입맛이 없다 생각했는데, 정말 깨끗하게 다 먹었다./사진=남형도 기자평소 바빠 아침밥을 못 먹는 날 위해, 이날만큼은 돼지불백 맛집을 찾아갔다. 아침엔 입맛이 없다 생각했는데, 정말 깨끗하게 다 먹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아침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제대로 된 백반 맛집으로.

평소엔 아침을 잘 안 먹었다. 일찍 출근했고, 회사에 가선 시간이 없었다. 오전은 이슈가 몰리는 시간이라 대응하기 바빴다. 공복에, 정신은 깨우느라 차가운 커피를 들이밀어 넣었다. 아침은 늘 그리 버텼다. 기사를 정신없이 쓰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매일 그러니 아침은 거르는 게 일상이 됐다.

그날만큼은, 제대로 된 아침밥을 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돼지 불백(불고기 백반)이 당겼다. 전날 오모 후배가 이승우 선수 기사를 썼는데, 거기에 돼지 불백이란 키워드가 나왔다. 이걸 보다 나도 모르게 입력된 모양이었다. 달달한 불고기 냄새가 나는 듯했다.

홍대입구 인근 돼지 불백 맛집을 찾았다. 기사 식당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돼지 불백 1인분을 시키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5분 만에 나왔다. 상추에 따뜻한 밥을 놓고, 고추장 불고기를 얹고, 마늘 하나를 넣고, 쌈장을 살짝 발라 쌈을 쌌다. 입안에 가득 차야 제맛.

그렇게 15분 만에 아침을 다 해치웠다. 어찌나 맛있던지. 아침엔 원래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녔단 걸 알았다. 바빠서 못 먹은 거였다. 느긋하게 천천히 먹으려 했는데 잘 안 됐다. 내 몸이 이미 '속도'에 익숙해진 탓일지.

작은 사치, '택시'를 탔다
가을과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찰떡 궁합이다./사진=남형도 기자가을과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찰떡 궁합이다./사진=남형도 기자
가을 길을 천천히 걸으니,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고소하고 깊은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였음 싶었다.

아담한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광고 팻말엔 '연극배우'가 한다고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더 창의적이고 예술적이지 않겠어요?'란 말에 끌린 것인지. 아니면 예술인들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걸 잘 알아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던 것일지.

아메리카노 하나를 주문하고, 준비해 간 텀블러를 올려놓았다. 커피 내리는 소리와 함께 그윽한 커피 향이 코끝으로 전해져 왔다. 이름 모를 팝송이 가게 인근을 채웠다.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고, 햇볕은 따스했고, 낙엽은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여유로운 광경에 조금 더 행복해졌다. 텀블러 뚜껑을 못 닫을 만큼 꽉 담긴 커피를 보니, 맘이 더 풍요로웠다.

텀블러를 들고 다시 움직였다. 독립영화를 보러 종로 서울극장에 갈 참이었다. 오전 11시 50분 영화였다. 시간이 40분쯤 남아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나도 모르게 홍대입구역까지 분주히 가다, 택시 한 대가 지나가는 걸 봤다. 택시는 평소 거의 탄 적이 없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정말 급할 때만 탔었다. 택시비가 아까워서. 환승을 두세 번씩 해도, 어떻게든 버스와 지하철을 탔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작은 사치'를 부려보고 싶었다. 매일 만원 버스에, 지하철 인파에 끼여 낑낑대니까,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뒷좌석에 앉으니 편안했다. 배불리 아침을 먹은 탓인지, 모처럼 아늑한 이동을 해서인지, 나른한 졸음이 쏟아졌다. 기사님이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희미해졌다.

한적한 영화관에서, 맘껏 울었다
독립영화를 보고 싶어, 홀로 영화관을 찾았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감정을 표출할 수 있어 좋았달까./사진=남형도 기자독립영화를 보고 싶어, 홀로 영화관을 찾았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감정을 표출할 수 있어 좋았달까./사진=남형도 기자
영화관에 도착하니 11시 30분쯤 됐다. 택시비는 1만원, 속이 살짝 쓰렸다.

보기로 한 영화는 '벌새'였다. 1994년에 사는 14살 중학생 은희의, '보편적이고 찬란한 기억'이란 줄거리가 맘에 들었다. 조금 찾아보니 영화제에서 호평도 많이 받았단다. 나도 그 시절을 살았었고,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성수대교가 말도 안 되게 무너졌고,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반려견 아롱이를 처음 데려온 해이기도 했다. 지나간 지 오래된 기억들이 궁금해졌다.

2층에 있는 영화관에 들어가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어왔나 싶어 두리번거리다, 자리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 관객은 모두 6~7명 남짓. 어쩐지 마음이 편했다.

또 보고 싶은 영화, 벌새. 성장통을 겪었던, 흘러간 옛 시간들이 떠올랐다./사진=남형도 기자또 보고 싶은 영화, 벌새. 성장통을 겪었던, 흘러간 옛 시간들이 떠올랐다./사진=남형도 기자
은희가 겪는, 섬세하고 애잔한 성장통을 보며 나를 떠올렸다. 완벽하지 않고, 서툴러 넘어지기 일쑤였던 날들이 생각났다. 저절로 어른이 된 게 아니라, 켜켜이 쌓인 시간 덕분이었다. 별 것 아닌 것에 싸우고, 울며 화해하는 은희를 보며 눈물이 터졌다. 영화관이 한적한 덕분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히 울었다. 해묵은 감정들이 시원스레 내려갔다.

영화 제목인 '벌새'는 가장 작은 새지만, 꿀을 찾아 아주 멀리까지 날아다닌단다. 나 또한 꿈을 찾겠다고 멀리까지 날다가, 어느 날 문득 1994년의 나로 돌아왔다. 사소하게 흘렀다 여긴 어린 시절은 조금도 의미 없지 않았고, 무척 생생했다. 낯설고도 여운이 짙은 2시간이었다.

꿈꾸던 20대의 흔적들
대학교를 10년 만에 찾았다. 오래 전 꿨던 꿈들을 떠올리고 싶어서, 20대 흔적들을 돌아보고 싶어서. 그땐 이 오르막길을 지나다니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사진을 찍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대학교를 10년 만에 찾았다. 오래 전 꿨던 꿈들을 떠올리고 싶어서, 20대 흔적들을 돌아보고 싶어서. 그땐 이 오르막길을 지나다니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사진을 찍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지하철을 타고 대학교로 갔다(택시는 두 번 못 탔다). 졸업한 지 무려 10년 만이었다. 꿈을 꾸던 흔적들이 보고 싶었다. 그때 기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지근해진 물을, 한 번쯤 펄펄 끓이고 싶어서였을까.

대학교 때 꿈이 PD였다. 처음엔 라디오가 하고 싶었다가, 나중엔 다큐멘터리 PD를 꿈꿨다. 적성을 뒤늦게 알고 바꾸느라,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그래 봤자 20대 초반인데, 그땐 그게 참 크게 느껴졌다.

미리 경험해보고 싶어 학교 방송국에 들어갔었다. "나이 많아도, 기수가 많으면 선배인데 괜찮느냐"고 해서 얼마든 좋다고 했다.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아녔다. 해보고 싶은 게 있었고, 그만큼 간절했었다.

오랜만에 캠퍼스를 밟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정문 쪽에선 동아리 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편의시설 안 식당은 다 바뀌어 있었다. 분식집도, 햄버거 가게도. 아는 공간인데, 온통 낯선 얼굴들만 있었다.

스피커를 보고, 옛날 생각이 났다. 교내 첫 방송을 한 날, 음악을 틀어놓고 재빠르게 창문을 열었었다. 학교 전체에 울리는 음악을 들어보고 싶어서. 그게 그땐 왜 그렇게 설레고 좋았는지 모르겠다.

노천극장에 앉아
여기서 짜장면도 참 많이 시켜 먹었는데, 시간이 참 빠르다. 공강 시간에 잠시 쉬는 대학생 코스프레를 해봤다. 사실 별 생각을 안 하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뒤통수 셀카여기서 짜장면도 참 많이 시켜 먹었는데, 시간이 참 빠르다. 공강 시간에 잠시 쉬는 대학생 코스프레를 해봤다. 사실 별 생각을 안 하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뒤통수 셀카
중앙도서관을 들어가려다, '학생증'을 찍어야 한단 걸 새삼 깨달았다. 부질없이 뒤돌아서서 나왔다. 난 여기에 있었지만, 또 여기에 없었다.

'이젠 이방인이구나', 노천극장에 앉아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 서랍(노트 이름)'과 만년필을 꺼내 시(詩)나 한 편 써볼까 했다. 절대 외로워서 그랬던 건 아니다. 내용은 이랬다.

과거를 그리워해도

돌아갈 수는 없다.

내가 있던 그곳은

이미 흘러가버렸다.

함께하던 사람도,

웃음과 울음과 힘듦도.

그걸 새삼 눈으로 봤다.

오랜만에 찾은 대학에서 끼적인 메모들. 감성 돋게 초록색 노트에 적어 보았다./사진=남형도 기자오랜만에 찾은 대학에서 끼적인 메모들. 감성 돋게 초록색 노트에 적어 보았다./사진=남형도 기자
비로소 알았다. 그 시간을 만든 건, 그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걸. 점심때 노천극장서 짜장면을 나눠 먹고, 죽어도 마음처럼 안됐던 사랑 얘기를 하고, 받아주지 않는 회사를 탓하며 푸념하고, 하나둘씩 사라지는 동기들을 보며 불안해했던.

단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 된 건, 사람 때문이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이들 사이에 머무르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책 2권에, '오후 이슬'을 마셨다
동네 정자에서, 책 두 권과 오후 이슬. 더 바랄 게 없다./사진=남형도 기자 셀카동네 정자에서, 책 두 권과 오후 이슬. 더 바랄 게 없다./사진=남형도 기자 셀카
늦은 오후, 짧아진 해가 어스름해질 무렵 동네로 돌아왔다. 천성이 '집돌이'라 역시 여기가 맘에 제일 편했다.

돌아오는 길, 요즘 핫한 '닮은 연예인 찾기'를 해봤다. 웨딩 촬영할 때 찍은, 메이크업까지 한 최고 잘 나온 사진을 입력했다. 그랬더니 전현무 아나운서가 나왔다. 이어 똘이 사진도 한 번 넣어봤다. 똘이 닮은 꼴 연예인은 배우 이민기가 나왔다. 똘이에게 진 느낌이었다(뭐 똘이는 잘생겼으니까).

동네에서 한 번쯤 '책맥(책 보며 맥주 마시기)'을 해보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서 맥주 대신 소주를 샀다. 포켓 소주가 귀여워서 그만 충동구매를 했다.

똘이(반려견)야, 넌 왜 이민기가 자꾸 나올까./사진=남형도 기자똘이(반려견)야, 넌 왜 이민기가 자꾸 나올까./사진=남형도 기자
'노견일기'라는, 나이 든 반려견에 대한 만화책과 '그 쇳물 쓰지마라'란 제목의 시집 두 권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리고 포켓 소주를 따서, 홀짝거리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취기가 적당히 올라 웃음도 눈물도 조금씩 과해졌다. 나이든 강아지가 떠나는 장면을 몰입해서 보다가, 이미 떠난 아롱이와 앞으로 떠날 똘이가 생각나 눈물을 한 바가지 또 쏟았다.

발그레해진 얼굴을 시원한 가을바람이 두드리며 위로했다. 노을이 얼굴색만큼 불그스름해질 때쯤, 책을 덮고 집으로 향했다.

방에서 '막춤'을 췄다
이것 또한 막춤의 일부분이다. 무슨 음악이었는진 까먹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창틀 셀카이것 또한 막춤의 일부분이다. 무슨 음악이었는진 까먹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창틀 셀카
마지막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아무도 안 볼 때, '막춤'을 추는 거였다. 타고난 몸치라서, 누군가 보면 쑥스러워서, 한 번도 맘껏 그리 못했다.

주저하다 결심한 계기는 영화 '조커'였다. 주인공 아서가 계단에서 춤추는 명장면을 보고, 감정이 해방되는 걸 느꼈다. 내 기분도 서툴고 어색하더라도, 한 번쯤 춤으로 표현하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집에 와 반팔 티에 편안한 바지로 갈아입었다. 관절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줄 작정이었다. 텅 빈 방에 들어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광란의 30분을 보냈다. 처음엔 기왓장처럼 은은하게 춤사위를 그리다가, 어느덧 용광로가 됐다. 세계 어느 춤과 비교해도 근본조차 찾을 수 없는, 이상한 막춤이 튀어나왔다. 나를 의식해 점잖게 추다가, 흥이 올라 격해지다가, 무아지경에 빠져 유체이탈을 할 것 같은 경지에 달했다. 내가 춤을 추는 것인지, 춤이 나를 추게 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때 딱 멈췄다.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을, 맑아진 표정을 보고 나니 알게 됐다. 내 안에 꽤 많은 것들이 있었고, 그걸 비워낼 시간도 필요했다는 걸.

'로망'은 저 멀리, 어딘가 있다고 여겼다
편안한 단화는, 땡땡이 치는 날엔 필수다./사진=남형도 기자편안한 단화는, 땡땡이 치는 날엔 필수다./사진=남형도 기자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그 하루가, 내겐 큰 위로가 됐다. 그게 정답을 준 것도, 그로 인해 내 삶이 달라진 것도 아녔어도. 다음날 새벽, 난 다시 알람 5개를 괴로워하며 껐고 지옥철에 시달렸으며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시간을 온전히 보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치유가 됐다.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내 마음을, 올 한 해가 다 가도록 꾹꾹 누르며 살았었다. 책임감과 성실함, 부지런함, 빠릿빠릿함, 이런 가치들을 앞에 두고 다 한편에 미뤄뒀었다. 그러니 표정이 자꾸 굳어가고, 마음이 알게 모르게 딱딱해졌다. 어떤 상황에서건 계속 굴러가도 좋은 기계가 아녔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이었다. 기계도 하물며 가끔은 고장이 나니까.

'로망'의 하루를 보냈다. 뒤늦게나마 내 맘을 존중해줬다. 그러니 답답했던 마음에 숨통이 트였다. 묵혀뒀던 다양한 감정이, 낯선 경험에 지루하지 않은 생각들이 튀어나왔다. 모처럼 버티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기분을 느꼈다. 오랜만에 재밌게 보내서 좋았다.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내 삶의 로망은, 늘 저 멀리 어딘가에 있다고 여기며 살았었다. 일상의 지루함 속에 낭만을 다 묻어뒀었다. 사치라 생각했다. 배부른 소리였다. 바빠 죽겠는데 무슨, 정신없어, 힘들어, 피곤해, 이런 말들이 일상을 독차지했다.

그게 아녔다. 맘먹으니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닿지 않는 게 아녔다. 못하는 게 아녔다. 대단히 큰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녔다. 그저 엄두를 못 내고, 겁을 먹고, 생각을 안 한 것이었을 뿐. 실현 가능한 로망들이, 내 삶을 다채롭게 했다.

그리고 마냥 좋을 줄 알았던 하루도, 어쩔 수 없이 나쁜 것도 한데 섞여 있다는 것도. 텀블러의 커피를 가방에 쏟고, 밥을 급하게 먹느라 속이 더부룩해지고, 모르는 이가 지나다 부딪치고도 사과하지 않고, 그런 사소한 일들 말이다.

그러니 지금을 너무 지루해하지 않고, 어떤 하루만 부러워하지 않겠다고. 지나가면 나쁜 건 아스라이 희미해지고, 좋은 건 선명해지는 법이니.
집 한편에 고이 걸려 있는, 사진들. 누군가의 무엇이라서 행복하다는 걸./사진=남형도 기자집 한편에 고이 걸려 있는, 사진들. 누군가의 무엇이라서 행복하다는 걸./사진=남형도 기자
에필로그(epilogue).

퇴근해서 녹초가 된 아내가 집에 와 물었다. 회사 땡땡이치니 좋았느냐고.

나도 모르게 "외로웠다"고 말한 뒤 웃었다. 진심이었다. 홀가분하고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쓸쓸했다. 오랜만에 간 캠퍼스에서, 한 남학생이 엉거주춤 넘어진 여자친구에게 "다친 데 없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면서. 아내가 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무엇이라서, 그 무게를 짊어지느라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더라도.
누군가의 무엇이라서, 그 안에서 또 행복한 것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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