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의 강한 의지…"못 충격에도 ESS 배터리 발화 없었다"

머니투데이 울산=우경희 기자 2019.10.2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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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삼성SDI, 고강도 화재 재발방지 대책 후 이례적 울산공장 공개

전명현 삼성SDI 사장이 안전성 평가동에서 실시한 소화시스템 시연에 참석해 ESS 안전성 대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삼성SDI전명현 삼성SDI 사장이 안전성 평가동에서 실시한 소화시스템 시연에 참석해 ESS 안전성 대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삼성SDI


굉음을 내며 30cm 두께 쇠 문이 닫혔다. 벽은 80cm 두께 콘크리트. 방공호 수준의 실험실 안에는 삼성SDI가 만든 ESS(대용량에너지저장장치)용 배터리 모듈 두 개가 세팅됐다. 삼성SDI의 ESS 화재 방지 종합대책에 대한 시연이 이뤄지는 현장이었다. 기자단이 실험실 밖에서 모니터로 내부 상황을 주시했다.



허은기 중대형시스템 개발 전무가 신호를 주자 한쪽 모듈(배터리셀을 여러 개 조립한 ESS부품)을 미리 겨누고 있는 두꺼운 쇠못이 천천히 배터리셀에 다가갔다. 쇠못이 셀을 파고들자 이내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쏟아져나왔다. 모니터에 표시되는 셀 내부 온도가 치솟기 시작했다. '단락'(쇼트)으로 인한 과부하가 발열로 이어진 것이다.

배터리셀은 일종의 깡통인 캔으로 덮여 보호된다. 그 셀을 묶은 모듈도 다시 금속 케이스 속에 들어가 보호된다. 모듈을 묶은 랙도 마찬가지다. 가장 안에 있는 배터리셀이 직접 못 등으로 충격을 입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그럼에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테스트가 이뤄진 셈이다.



삼성SDI는 이 단계에서 바로 소화하는 장치를 ESS용 배터리 전체에 추가하고 이미 국내 판매된 모든 현장에도 장착을 시작했다. 가열되면 미세한 캡슐로 만들어진 소화제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터져나와 불을 끈다. 효과는 눈으로 확인됐다. 못이 박힌 모듈에서는 연기만 뿜어져 나올 뿐 불꽃은 없었다. 셀과 셀 사이에 촘촘히 추가한 방열판 덕에 열이 옆 셀로 옮겨가지도 못했다.

곧이어 안전장치를 추가하지 않은 기존 배터리팩에도 같은 방식의 못질이 이뤄졌다. 연기에 이어 불꽃이 튀더니 이내 배터리모듈이 화염에 휩싸였다. 처음 불이 난 셀의 온도가 300도 이상으로 올라가자 옆 셀도 온도가 150도에 이르고 곧 불이 붙었다.

주황색 사다리모양 장치가 미세한 소화액 캡슐로 구성된 발화방지장치다. 불꽃이 닿으면 캡슐이 터지면서 자동 진화된다./사진=삼성SDI주황색 사다리모양 장치가 미세한 소화액 캡슐로 구성된 발화방지장치다. 불꽃이 닿으면 캡슐이 터지면서 자동 진화된다./사진=삼성SDI
삼성SDI의 이날 시연은 국내서 더 이상 ESS 화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삼성SDI는 '안전삼성'의 척도 격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삼성SDI의 배터리 사업에 대해 '업의 본질'을 지시하며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라고 강조한건 유명한 일화다. 이번 삼성SDI의 고강도 화재 재발방지 대책 역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정확한 발화 원인을 확정지어 발표하지 못하고 있지만 삼성SDI, LG화학 등은 외부 과전압 유입에 따른 배터리 과열이 화재의 원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SDI가 이번 대책에 외부 전기충격 유입 방지 3중 장치를 포함시킨 이유다.

이날 시연된 발화방지 대책에 3중 장치 등을 포함해 안전대책에 들어가는 예산만 2000억원. 삼성SDI의 예산 투입은 공동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다. 전영현 삼성SDI 사장은 이날 시연회에 취재진과 동행하고 "셀이 발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연이은 화재에 대해 국민들께 깊이 사죄드린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전 사장은 "이대로 가다가는 이제 막 커지고 있는 ESS 산업 생태계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 30여건에 가까운 화재가 발생한 가운데 국내 ESS 추가 신설은 화재 사고 이후 제로(0)를 이어가고 있다.

삼성SDI는 글로벌 ESS 점유율 1위다. LG화학과 함께 시장을 양분해 왔다.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 유럽 등에서 친환경 신재생에너지 바람을 타고 ESS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서 발생한 화재 사고는 신뢰도 측면에서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중국 업체들은 물론 테슬라 등 ESS 후발주자들이 한국 기업들의 시장을 노리고 있다.

삼성SDI에 이어 LG화학도 유사한 발화 방지 대책을 수립했다. 문제는 기존 설치된 현장에 안전설비를 추가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전 사장은 "국내 1000여개 사이트(현장)에 다 대책을 반영하는데 7~8개월이 걸린다"며 "최대한 앞당겨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아쉬움도 있다. 2000억원은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돈도 아니다. 왜 미리 이런 안전대책을 세우지 못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원천적으로 화재를 막는 장치를 갖췄다면 연이은 발화가 오히려 안전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됐을 수 있다는 거다.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뒤늦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도 아쉬운 지점이다. 전 사장은 "미국 등 선진국은 이미 설치 및 가동 가이드라인에 따라 ESS가 설치, 운영되고 있다"며 "정부 요청이 있으면 가이드라인 마련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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