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최진리│① 도로시를 위한 기도

김리은 ize 기자 2019.10.22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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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최진리│① 도로시를 위한 기도


약 1년 전인 작년 10월 25일, 리얼리티 프로그램 ‘진리상점’의 첫 회가 공개됐다. 설리는 이 프로그램에서 본명인 ‘최진리’를 걸고 팝업스토어를 운영하며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유에 대해 “내 편” 혹은 “나만의 사람을 많이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지난 6월 21일에는 JTBC ‘악플의 밤’에 출연해 자신에 대한 악플을 읽으며 마약을 한다는 의혹에 대해 명확히 해명하고 노브라에 대해 “개인의 자유”라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같은 달 29일에는 수록곡 3곡 모두 작사에 참여한 싱글앨범 ‘고블린’을 공개했다. 당시 설리는 앨범 발매 직후 개최한 팬미팅에서 “‘도로시’는 꿈꾸는 나, ‘온 더 문’은 잠들기 전의 나, ‘고블린’은 현재의 나를 담아 여러분이 못 보셨던 여러 부분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라고 수록곡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SNS만으로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스타가 하루종일 팝업스토어를 지키며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자신을 둘러싼 부정적인 시선에 대해 정면으로 목소리를 내며, 가수로서는 스스로를 노래의 소재로 삼아 진정한 자신을 전달하려 했다. 지난 1년 동안, 설리는 연예인으로서 받는 시선에 가려진 인간 ‘최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어렸을 때부터 눈치 보는 행동을 싫어했다.” ‘악플의 밤’에서 설리는 춤 연습 도중 윗사람이 오자, 갑자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 대충 추던 춤을 그대로 보여줬다는 일화를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평소 성격 그대로 그는 SNS에서도 자신이 아닌 모습을 억지로 꾸며내려 하지 않았다. 연인과 데이트하거나 키스하는 사진, 자유롭게 노는 사진, 혹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노브라’ 상태로 일상을 보내는 사진을 그대로 업로드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모순적이었다. ‘디스패치’가 사생활의 영역인 그와 최자의 데이트를 몰래 촬영하고 보도하는 것은 문제시되지 않았지만, 설리 스스로 연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불편한 일처럼 언론에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걸그룹 활동 당시 미성년자였던 설리에게 ‘섹시하게 속살 드러내며’(2010년 ‘서울신문’), ‘아찔한 반전뒤태’(2012년 ‘티브이데일리’) 등의 제목을 다는 것, 혹은 이처럼 여성의 신체를 성애화하고 관음하는 사회적 시선 속에서 여성만이 불편한 속옷을 착용하고 신체를 가려야하는 현실은 논란이 되지 않았다. 반면 그가 단지 “편안해서”라는 이유로 선택한 노브라는 사진 속에서 굳이 가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됐다. 걸그룹 여성 연예인으로서 대중의 고정관념을 벗어난 행동을 할수록,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수록 설리는 문제적인 인물로 소비됐다.

설리의 싱글앨범 제목이자 타이틀곡인 ‘고블린’은 이처럼 대중에게 사랑받기 어려운, 그럼에도 자신의 모습으로 사랑받기를 원하던 스스로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로 보인다. ‘고블린’이라는 제목은 그가 기르던 털 없는 품종인 스핑크스 고양이의 이름이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괴롭힌다고 알려진 난쟁이 마귀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는 ‘고블린’ 발매 직후 있었던 팬미팅에서 “SNS에 고양이 고블린을 향해 '징그럽다', '자기 같은 것만 키운다'라며 무서워하는 글이 많았다”라면서 “(노래로) 선입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고블린’의 가사는 ‘널 가득 안고 싶은 건 / 너의 맘의 하얀 안개 까맣게 물들일게’라며 하얀 색을 선으로, 까만 색을 악으로 여기는 세상의 고정관념을 뒤집고 싶다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Don’t be afraid of the cat without fur’(털 없는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마)라며 ‘just wanna tell you hi’(인사만 하려고 했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모습이 마치 털 없는 고양이나 마귀 ‘고블린’처럼 낯설게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저 진실하게 다가가려는 인사일 뿐이라는 마음의 표현. 실제로 설리는 ‘악플의 밤’에서 노브라가 이슈가 되는데도 사진을 올리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자 “무서워하고 숨어버릴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거(노브라)에 대해서 편견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멈추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예인은 항상 대중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동시에 사랑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딜레마에 처한다. ‘고블린’의 뮤직비디오는 ‘해리성 자아’를 가졌다는 설명을 바탕으로 설리의 세 가지 자아를 보여주면서 그가 겪었을 심리적 갈등을 묘사한다. 첫 번째 자아는 낯선 사람들이 이끄는 수레에 실려 집으로 들어가고, 무기력하게 의자에 앉아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집에 침범하는 사람들을 피하지만 결국 타인이 속삭이는 말들에 둘러싸인다. 반면 두 번째로 등장한 설리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남들과 구별되는 화려한 복장을 입은 채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동작을 흉내내며 그들과 섞이려는 시도는 그를 지쳐 쓰러지게 만들고, 사람들은 시종일관 눈을 가리며 그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 대중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낮이 지나 밤이 되면, 전사 복장을 한 세 번째 자아는 첫 번째 자아를 없앤다.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매일 밤마다 억눌러야만 연예인 ‘설리’로서 대중 앞에 나설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최진리’로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까지 억누를 수는 없었다. 지난 1월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진리상점’ 직원 및 친구들과의 홈파티 사진이 적나라하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자, 설리는 ‘진리상점’의 마지막 영상에서 “저를 아시는 사람들은 악의가 없다는 걸 잘 아시는데, 저한테만 유독 색안경 끼고 보시는 분들이 많아서 속상하기는 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진리상점 많이 관심 가져주시고 다시 처음부터 정독해주세요. 진리를 조금 더 아실 수 있습니다. 진리를 찾아서. 기자님들 저 좀 예뻐해주세요. 시청자님들 저 좀 예뻐해주세요.”

설리가 ‘악플의 밤’에서 외모 평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꾸준히 이야기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그는 외모에 대한 악플 혹은 평가에 대한 김지민과 산들의 대화를 듣다가 “칭찬도 평가”라는 생각을 밝혔고, 특히 마지막으로 방송된 회차에서 이탈리아에서는 외모 칭찬이 한국보다 조심스럽다는 알베르토의 이야기를 듣다가 “외모 평가를 정말 정말 심각하게 좀 안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외모가 경쟁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연예산업에 종사하고, 그 스스로도 항상 외모로 화제가 되거나 사랑받았던 설리가 외모 평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야기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악플의 밤’에서 f(x) 시절 ‘설리펀트’라는 별명이 붙었던 시기를 직접 언급하면서 “그때는 누가 저 쳐다보는 것도 싫었다”라는 고충을 이야기했다. ‘진리상점’에서도 설리는 오디션을 보고 외모 지적을 받은 팬이 “살 빼라고 적어달라”라고 요청하자 “너만 빼라고 얘기하는 건 싫어. 같이 다이어트 열심히 하자고 써줄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연예인으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 외모 관리와 다이어트가 필요한 현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외모 평가가 사람을 존중하기보다 품평하거나 대상화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표현하고, 자신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누군가를 품평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조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그의 모습들은 연예인 ‘설리’이기 이전에 인간 ‘최진리’로서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다는 표현이면서, 남들이 당연하거나 옳다고 여기는 ‘하얀 안개’를 ‘까맣게 물들이는'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스스로 ‘꿈꾸는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힌 ‘도로시’의 가사에서, 설리는 자신이 꿈꾸던 다양한 자아들을 보여줬다. ‘질투의 도로시 / 사랑의 도로시 / 진리의 도로시 / 화려한 도로시’라는 가사를 노래하는 설리의 목소리를 감싸는 배경음악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가 떠난 모험을 표현하듯 느린 속도로 시작해 점점 빠른 비트와 다양한 멜로디들의 중첩으로 전환된다. 반면 다양한 ‘도로시’를 노래하는 설리의 목소리는 곡이 끝날 때까지 처음 시작된 리듬과 멜로디를 꿋꿋이 유지하면서 ‘미래를 위한 기도’라는 마지막 가사에 도달한다. 이는 마치 자신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걸음걸이를 꿋꿋이 유지하면서 진실한 ‘최진리’이기를 멈추지 않았던 설리의 생전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설리 역시 도덕적으로 항상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f(x) 탈퇴 당시에는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고, 그 스스로도 인정했듯 실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설리는 항상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연예인의 위치에서 인간으로서의 진실함을 보여주려 했고,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특히 지난 1년 동안에는 자신의 위치와 영향력을 인식하며 목소리를 냈고, 예능과 음악에서 스스로를 콘텐츠로 삼으며 점점 다양한 ‘도로시’들을 보여주던 중이었다. 만약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점차 찾아가는 그의 성장기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도로시는 이제 세상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원한 모험을 떠났다. 이제 설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뒤늦게나마 ‘미래를 위한 기도’를 올리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부디 그가 지금 떠난 모험에서는 자신만의 걸음걸이를 멈추지 않을 수 있기를, 그리고 어떤 ’도로시’의 모습으로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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