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psody, 랩 아이콘이 된 여자

강일권(‘리드머’, 음악평론가) ize 기자 2019.10.16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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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힙합이 태동한 이래, 매시기가 중요했지만, 2000년대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 주류에 영향을 끼치는 음악이자 문화였던 힙합이 곧 주류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래퍼들에겐 암흑기의 시작이었다. 수는 적을지언정 확고한 영역을 확보해온 여성 래퍼들의 활약과 상업적인 성공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90년대가 배출한 마지막 여성 랩스타 이브(Eve) 이후, 꽤 오랫동안 여성 래퍼의 침체기가 이어졌다. 다시금 여성 랩스타의 계보가 이어진 건 2010년대 들어서다. 니키 미나즈(Nicki Minaj)와 이기 아잘리아(Iggy Azalea)가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엄청난 팬덤을 구축했고, 후발 주자였던 카디 비(Cardi B)가 새로운 여왕 대열에 합류했다. 주류 씬의 상황만 보자면, 지금은 제2의 여성 래퍼 전성기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이들과 다른 유형의 여성 랩스타를 갈망했다. 화려한 비주얼을 내세우고, 파티, 클럽, 돈, 섹스 등을 얘기하기보다는 좀 더 진중한 주제와 리리시즘(Lyricism)에 집중하는 래퍼 말이다. 한 마디로 ‘이 시대의 힙합 아이콘‘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같은 존재가 나와주길 바랐다. 랩소디(Rapsody)는 바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랩소디가 2008년, 베테랑 프로듀서 나인스 원더(9th Wonder)의 지원 아래 데뷔했을 때만 해도 언더그라운드에서 약간의 주목을 받는 정도였다. 하지만 음악적인 모든 면에서 발전을 거듭한 것은 물론, 공격적인 창작 활동으로 인지도를 높였고, 양질의 믹스테입(Mixtape)과 앨범을 통해 획일화된 주류 힙합의 대안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일단 랩을 정말 잘한다. 부드러우면서도 옹골진 플로우, 인종과 여성 문제를 비롯한 사회 이슈를 꿰뚫는 주제의식, 탁월한 메타포와 펀치라인으로 무장한 가사가 주무기다. 더불어 정박자의 드럼과 샘플링을 조합한 비트, 그리고 의식있는 가사를 중시한 ‘90년대 동부 힙합을 근간으로 했다는 점도 랩소디를 더욱 가치있어 보이게 하는 요소다. 특히, 커진 존재감은 2015년 켄드릭 라마와의 작업을 통해 도드라졌다. 랩소디는 그해 나온 켄드릭의 걸작 [To Pimp a Butterfly]에서 피처링으로 초빙된 단 두 명의 래퍼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많은 이가 인정한 클래식급 앨범을 두 장이나 보유 중이다. 자전적인 이야기 속에 블랙 커뮤니티와 사회의 이슈를 절묘하게 녹인 ‘Laila's Wisdom’(2017)과 거기에 더해서 흑인여성에 대한 헌정을 담은 ‘Eve’(2019)가 그것이다. 이는 니키 미나즈, 이기 아잘리아, 카디 비도 아직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젠더를 떠나서도 오늘날 정규 앨범 두 장을 연속으로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은 래퍼는 결코 흔치 않다. 온전히 실력만으로 이룬 성과여서 더 대단하다. 2016년엔 힙합 모굴 제이지(Jay-Z)가 설립한 회사 락 네이션(Roc Nation)과 계약하면서 보다 든든한 배경을 얻었다. 그럼에도 태도가 변한 것은 없다. 오히려 다뤄야 할 문제를 더욱 치열하게 파고든다. 흑인여성과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냉철하면서도 우아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영향력까지 발휘하는 래퍼는 적어도 2000년대 들어 랩소디가 유일하다. 랩 아이콘이 되기 위한 모든 요건을 갖춘 셈이다.

“얼간이 놈들에게 경고하는데, 여자를 절대 때리지마.”, “우린 신과 제일 가까운 존재야.”. 랩소디의 랩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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