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수출규제 100일]“日수출규제, 국가 R&D 체질 개선 불당겼다”

머니투데이 류준영 기자 2019.10.0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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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기술 자립역량 확보 위한 ‘기초원천연구 투자’ 확대, ‘장기R&D 시스템’ 전환 일조

편집자주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로 시작된 '한일 경제전쟁'이 11일로 100일째를 맞는다. 보이콧 재팬, 지소미아 종료 등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치가 이어지면서 두 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가시화하고 있다. 승자 없는 한일 경제전쟁, 탈출구는 어디서 찾을수 있을까.

소재 부품 관련 첨단 분석 장비 모습/자료사진=DGIST소재 부품 관련 첨단 분석 장비 모습/자료사진=DGIST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가 시행된 100일간 한국 R&D(연구·개발) 생태계 지형 변화도 본격화됐다.



이번 사태는 기술적 관점에서 단기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한선화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정책본부장은 “일본이 사전에 한국의 산업과 기술을 관찰·분석해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고, 단기 대응이 쉽지 않은 포인트(품목)만 잡은 탓”이라고 했다.

본질적 해법인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립화를 위해선 정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함께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고착화된 국내 R&D 제도·시스템의 오랜 환부를 도려내는 일이 최우선 과제로 던져졌다.



김명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국내 공공부문 R&D 투자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비해 사업화는 20% 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중장기 R&D 투자전략 부재 △현장 수요를 고려치 않은 공급자 위주 R&D △대기업·중소기업·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대학 모두 각자 연구에 몰두하는 이른바 ‘나홀로 연구’ 등도 시급히 개선할 문제점으로 꼬집었다. 정부는 국가 R&D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를 주축으로 이를 해소할 별도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는 등 대책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이번 일본 규제는 소재·부품·장비 R&D의 중요성을 또한번 각인하는 계기가 된 동시에 선진국에 비해 뒤쳐진 국내 R&D 생태계의 근본적 체질 개선을 유도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자료=과기정통부 자료=과기정통부
◇지난 실패 거울삼아…‘산·학·연 개방·사업화 연계’ 방점=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이후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부문 공급체인망이 붕괴됐고, 이런 위기속에서 당시 국내 반도체 업체 및 정부가 국산화를 강력히 추진했지만, 점차 문제가 해결되고 6개월 정도 지나자 다시 묻히고 말았다”며 “이번 만큼은 이런 과거 경험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소재·부품·장비 R&D 대책을 강구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동일본대지진 사태에 앞서 대일 역조 개선을 목표로 2001년 ‘제1차 소재·부품발전 기본계획’이 수립된 바 있다. 이후 2016년 제3차 계획에 이르기까지 소재·부품 R&D에 약 4조6000억원이 투입됐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일본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다양한 분석이 쏟아지나 과학기술 분야로만 볼 때 먼저 응용·개발 연구에 치중한 나머지 기초·원천연구 투자가 부족해 첨단소재원천기술 확보에 실패했다. 또 중장기 R&D 투자전략 부재로 미래 기술 대응에 미흡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정부는 이 같은 실패 요인을 거울삼아 지난 8월 제7회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투자 전략 및 혁신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먼저 기초·원천연구성과가 실용화·상용화를 거쳐 산업계로 연결될 수 있도록 산·학·연 개방성을 높이는 협력 R&D를 강화한다.

과기정통부는 기존 11개 공공연구기관 중심으로 운영돼온 소재연구기관협의회를 확대·개편해 ‘소재혁신전략본부’를 내년초 출범시킨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산·학·연간 협업채널을 강화하고, 대학․출연연·기업의 역할분담·협력의 다양한 성공모델을 창출한다는 복안이다.

또 기관과 부처 간 ‘이어달리기’를 강화해 공공 연구성과 사업화 연계를 촉진할 계획이다. 정부는 대학 및 출연연이 보유한 원천기술을 기업 수요와 이어 기술 상용화 간극을 해소하는 ‘소재혁신 선도 프로젝트’(2020년, 326억원)를 새롭게 추진키로 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소재·부품은 기초 연구개발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산업현장에서 사용되어야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며 “기술개발 이후 제품개발 생산까지 염두한 목표를 갖고 연구개발이 추진되도록 R&D시스템을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본관 브리핑룸에서'소재 부품 장비 연구개발 투자전략 및 혁신대책' 브리핑을 하고 있다/사진=과기정통부김성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본관 브리핑룸에서'소재 부품 장비 연구개발 투자전략 및 혁신대책' 브리핑을 하고 있다/사진=과기정통부
◇소재·부품 특성 고려한 예산 배분…“수요 기반 연구자 매칭 기초연구 추진”=R&D 예산 배분의 구조적 문제를 재검토하고, 보완책을 강구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이길우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사업조정본부장은 “그동안 연구기간과 연구비 배분에서 소재·부품의 특성을 반영하는 데 소홀했던게 사실”이라며 “단기 트렌드에 맞춰 유행처럼 바뀌는 연구 주제를 매번 제시해야만 하는 분위기와 이를 조장하는 연구개발비 배분구조 개선이 소재·부품 분야에서 특히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내년도 소재·부품·장비 기초·원천 R&D에 약 3372억원의 예산을 편성한 상태다.

국산화 R&D 로드맵 수립 전 폭넓은 기업 수요 조사를 한 점도 눈에 띈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앞으로도 기업의 수요을 사전에 조사하고 연구자와 매칭해 수요 지향적 기초연구를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시급을 요하는 소재·부품·장비 사업 예비타당서조사는 예외적으로 경제성 평가를 비용효과(E/C) 분석으로 대체하고, 사업 추진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종합평가에는 현장 전문가가 다수 참여토록 제도를 개선했다. 이처럼 신속한 R&D를 위해 패스트트랙 과제 추진 근거를 제도화한 점도 성과로 꼽힌다.

이길우 본부장은 “기술패권의 시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기초·원천연구에 다시 한번 주목할 때”라며 “창의적인 연구역량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연구성과들이 사업화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위해선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연구지원프로그램과 지원시스템을 계속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본부장은 새로운 연구지원프로그램·시스템으로 추가적으로 기초연구 속성에 맞는 연구관리 제도, 다양한 형태의 사업화 지원 프로그램, 창의성 중심의 평가제도, 개인중심의 펀딩, 신진연구자에 대한 폭넓은 지원 등을 제안했다.

김성수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이번 R&D 투자‧프로세스 혁신방안을 타 분야로도 확대‧적용해 내년도 R&D 예산(24조원) 운영의 효율화를 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관계부처 공동으로 7월부터 추진해 온 '100+α개' 한국 수출 제한 우려 핵심 품목 진단에 이어, 1000여개 일본 수출 규제 품목 분석을 오는 12월까지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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