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소년들 '실종→살해' 수사방향 달라진 결정적 증거

머니투데이 정유건 인턴 2019.09.2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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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소년사건' 재수사…유골 발견후 경찰 "저체온증 사망", 대학 의학팀 "둔기 타살 흔적"

민갑룡 경찰청장이 2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와룡산 세방골 개구리소년 유골 발견 현장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하고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뉴스1민갑룡 경찰청장이 2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와룡산 세방골 개구리소년 유골 발견 현장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하고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뉴스1


'화성연쇄살인사건' '이영호 유괴사건'과 함께 국내 3대 미제 사건으로 불리는 '개구리소년사건'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18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특정되며 다른 미제사건에도 관심이 높아지던 중 민갑룡 경찰청장이 20일 해당 사건의 재수사를 공식화하며 다시 주목을 받는 것.



'개구리소년사건'은 1991년 3월26일 조호연·김영규·박찬인·김종식·우철원 군 등 다섯 소년이 대구 달서구 와룡산에 도롱뇽알을 잡으러 갔다 실종돼 돌아오지 못한 사건이다. 사건 초기에 아이들이 잡으러 간 것이 도롱뇽알이 아니라 개구리알로 잘못 알려지며 '개구리소년사건'으로 불리게 됐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은 실종 당일 저녁 7시50분쯤 실종가정 부모들의 신고를 받고 와룡산 수색을 시작해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산을 뒤졌지만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당시 경찰은 아이들의 실종을 단순히 '가정불화에 의한 집단가출'로 판단하고 수사를 시작하는 우를 범했다. 가족들은 실종·납치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종이 장기화되며 사건은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군·경 연인원 35만명가량이 와룡산 주변을 포함한 전국을 다시 수색했지만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실종된 아이들은 2002년 9월26일 실종 11년 만에 와룡산 중턱에서 유골로 발견됐다. 유골은 당시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우근씨에 의해 발견됐다. 범행 현장에 범행도구나 범인의 DNA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11년 전 초동수사 때와 같은 성급한 수사와 무리한 주장으로 반발을 샀다.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조난을 당해서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북대 의학팀은 "두개골 손상 등 흔적이 확인됐다"고 중간발표를 했고 유골 발견 후 40일 뒤에는 "예리한 흉기나 둔기로 타살됐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시민들의 신고 1500여건을 바탕으로 사건을 조사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현재 '개구리소년사건'은 2006년 3월25일로 공소시교가 만료돼 범인을 잡더라도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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