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미│① 스스로 전쟁터가 된 여자

김리은 ize 기자 2019.09.1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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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미│① 스스로 전쟁터가 된 여자


지난 8월 발표된 선미의 싱글 ‘날라리(LALALAY)’의 가사는 대중에 대한 디스 곡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노래 속에서 ‘난리 법석’을 피우고 ‘벌떼’처럼 몰려오고, 선미를 ‘가루가 되도록’ 털며, ‘Naughty’할 뿐인 선미를 섣불리 ‘날라리’라 정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선미는 ‘날라리’의 뮤직비디오에서 작위적인 가발과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면서 자신의 상황을 풍자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대중은 선미가 미용실에서 화려한 스타일링을 하는 것에 창 밖에서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미용실에서 나온 선미의 뒤로는 그의 양갈래 머리와 의상을 모방한 댄서들이 서 있다. 특히 선미가 획일화된 것처럼 묘사되는 다수의 마네킹 위로 군림하듯 앉아있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날라리’가 묘사하는 대중은 선미를 ‘날이 선 칼날’ 위에 세우고 재단하는 한편, 그를 선망하며 ‘피리부는 Captain’으로 삼기도 한다. 지금 가장 대중의 관심을 받는 가수가 대중이 자신을 함부로 재단하는 동시에 숭배하며, 획일적으로 모방하기도 한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걸그룹 중 하나였던 원더걸스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 선미는 꾸준히 대중의 관심을 받아왔다. 그러나 정작 그 관심은 ‘입방아’와 ‘벌떼처럼 Wing Wing’ 몰려드는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MBC ‘라디오스타’에서 선미는 JYP 엔터테인먼트에서 활동할 당시 박진영이 자신에게 무대에서 ‘아무 표정도 짓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24시간이 모자라’나 ‘보름달’처럼 섹시함을 어필하는 콘셉트로 활동했다. 마치 자아가 없는 것처럼 대중의 욕망에 자신을 맞춰야 했고, 신체의 매력을 내세우는 콘셉트에는 인기와 함께 성희롱과 품평이 뒤따랐다. 그가 원더걸스를 탈퇴하고 솔로 가수로 독립한 이후에도 대중의 시선은 그를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은 작년 10월 선미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바탕으로 성 정체성을 추측하기도 했고, 지난 1월에는 체질적으로 마른 자신의 몸에 대한 관심과 평가가 지속되자 “제발 이제 내 체중에 대한 걱정은 그만해줘요”라며 스트레스를 토로했다. 그가 작년 7월 JTBC ‘비밀언니’에서 “요즘은 평가가 아닌 품평을 한다”라고 고충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선미는 이런 관심을 받고 살아가야 한다. 지난 3월 발표한 싱글 ‘누아르(Noir)’는 이런 모순의 반영이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자극적인 콘텐츠가 늘어나는 현상을 범죄와 폭력을 다루는 영화 장르 ‘누아르’에 비유한 이 곡을 발표할 당시, 선미는 인스타그램에 “‘관종경제’ 혐오를 부른다”라는 제목의 기사 캡처본을 업로드했다. 뮤직비디오에서는 머리카락이 선풍기에 걸린 위험한 상황이나 잘린 손가락을 SNS에 업로드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으려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했다. 이는 SNS로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표현해온 선미의 평소 모습과도 무관하지 않다. ‘누아르’ 전까지 선미가 발표한 ‘가시나’와 ‘주인공’, 그리고 ‘사이렌’이 뮤지션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선언이었다면, ‘누아르’는 ‘관종 경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모순에 대한 고백에 가까웠다. 이 맥락에서 ‘날라리’는 아티스트로서 자신이 느끼는 모순에 대한 질문을 대중에게 던진 것과 같다. ‘날라리’의 뮤직비디오에서 선미가 스타일링을 마치고 화려한 미용실을 걸어나올 때, 그의 무릎은 메이크업을 거치지 않은 어두운 상태로 노출된다. 그는 그 무릎을 거친 시멘트 바닥에 꿇으며(거친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춤을 춘다. 실제로 선미가 안무 연습 과정에서 생긴 무릎 상처를 SNS에 몇 차례 업로드했을 때, 미디어와 대중은 이를 마치 프로페셔널함을 보여주는 훈장처럼 묘사했다. 그가 월드 투어를 앞두고 체력을 위해 8kg을 증량한 것조차 외모에 대한 평가로 소비됐다. 선미는 춤을 추기 위해 몸을 혹사하고, 다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화려한 모습만 보거나, 상처를 자극적으로 소비하거나, 몸을 품평한다. 선미는 그것이 대중이 말하는 사랑이냐고 계속 묻는 듯하다.



‘날라리’의 뮤직비디오가 시선의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선미는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채 방에 갇혀 있거나 누워 있다. 카메라는 선미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선미는 자신의 몸을 관음하는 시선을 인식하고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카메라를 향해 주먹질을 한다. 선미는 대중이 자신을 어떤 위치와 시선에서 바라보는지 알고 있고, 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다. 방에서 선미를 내려다보던 카메라의 시선은 뮤직비디오의 후반부에서 선미가 가발을 쓴 채 춤출 때 선미가 내려다보는 구도로 전복되고, 마지막에는 ‘벌떼’가 쫓는 대상인 꽃을 삼킨다. 대중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별개로 자신이 대중을 바라보고자 하는 선언. 이것은 연예인, 특히 여성 연예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선미의 모순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커진다. 선미가 트렁크에 갇혀 있다가 나오는 첫 장면은 여성에 대한 강력 범죄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비현실적으로 왜소한 그의 신체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가 짧게 재단된 승무원 복장을 입은 채 왕관을 쓰고 있는 장면은 대중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주도권을 얻는 스스로에 대한 비유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의도와는 별개로 특정 직업군에 대한 대상화된 판타지를 이용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대중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맞받아치지만, 그 과정에서 대중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어필하기도 했고, ‘날라리’에서도 이 문제는 계속된다. 선미는 이 문제에 대해 비행기 조종사의 인사말을 통해 ‘I’ll take you high high high higher’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이용해 대중과 놀아주는 대신 날아오르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선미가 생각하는 ‘날라리’의 정의이기도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날라리’는 ‘주체적인 종속’, 혹은 ‘대중을 비판하는 대중음악’처럼 형용모순에 가까운 텍스트가 된다.

뮤직비디오 바깥에서 선미가 겪는 현실과 그에 대한 대응은 이 모순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선미는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퍼포먼스를 하면서 ‘날라리’ 뮤직비디오에서 비판적 의미를 갖던 장치들을 대부분 제거했다. 뮤직비디오의 초반 장면에서 선미가 가발과 선글라스를 쓴 채 스스로를 희화화하며 소화하던 안무들은 무대에서 윙크를 하거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대중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특히 뮤직비디오와 달리 거친 무릎이 메이크업을 거치면서 애초 '날라리'에서 제기했던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문제 의식도 함께 가려졌다. 여성 연예인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대상화와 품평이 일상화된 대중문화의 흐름에 스스로를 맞추어야 인기를 얻는다. 그렇게 영향력을 얻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가 생긴다. 하지만 그것을 ‘날라리’ 같은 노래에 담아 표현하려면, 역시 대중의 관심을 받아야 한다. 정확히는 ‘날라리’처럼 대중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시선을 끌 수 있어야 한다. 대중에 대해 이야기하는 메시지는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면 무의미해지고, 대중의 시선에 맞추려면 작품은 다수의 취향에 맞추어 재조직되어야 한다. 설령 그것이 의도된 메시지와 충돌하더라도 그렇다. 선미는 지금 여성, 특히 여성 연예인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문제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모순적인 상황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로 인해 선미에 관해 벌어지는 논란과 논쟁까지 포함해, 선미는 그 자체로 여성을 둘러싼 문제와 모순들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선미의 의도나 그에 대한 지지나 비판과 별개로, 이것이 선미를 이야기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다.

‘날라리’의 뮤직비디오 후반부에서 선미는 복수의 마네킹으로 상징되는 대중 위에 우뚝 선 한 마리의 나비가 된다. 그러나 누군가를 쏠 수 있는 벌과 달리, 나비의 화려함은 쉽게 바스러지는 것이기도 하다. ‘누아르’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선미는 여전히 ‘관종 경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연예인이고, 그가 잡은 운전대는 언제 또 외부의 충격에 흔들릴지 알 수 없다. 대중 역시 ‘날라리’가 의도한 메시지를 선미의 의도대로 수용해야할 의무는 없다. 다만 선미는 ‘날라리’를 통해 자신과 사회의 시선 간의 관계와 문제를 이야기했고, 이것은 모든 여성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선미는 자신의 삶 자체, 특히 몸의 문제를 논쟁 가능한 전쟁터로 삼았다. ‘날라리’가 원하는 것이 관심이라면, 최고의 선택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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