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자 이효리

황효진 (칼럼니스트) ize 기자 2019.09.0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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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자 이효리


“오늘은 콘셉트 없어. 오늘은 그냥 나야.” tvN ‘일로 만난 사이’에서 오늘의 콘셉트가 무엇인지 묻는 유재석에게 이효리는 이렇게 답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유재석과 함께 일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는 게 전부인 이 예능 프로그램의 첫 화에서 이효리는 억지스러운 상황을 만들거나 과장된 행동으로 웃음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모두가 ‘국민 MC’라 부르며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유재석을 추켜올리는 대신, 그에게 아쉬울 것 없는 자신의 상황과 캐릭터를 통해 이렇다 할 스토리가 없는 관찰예능에 이야기를 더한다. 그는 SBS ‘일요일이 좋다-패밀리가 떴다’ 방송 당시 자신을 다른 여성 게스트들과 비교하며 깎아내렸던 유재석에게 끝까지 사과를 요구하고, 유재석이 과장된 제스처로 손가락에 가시가 박혔음을 카메라 앞에서 강조하자 “옛날 예능 스타일”이라고 면박을 줬다. ‘일로 만난 사이’에서는 함께 차를 타고 일터로 이동하는 동안 너무 바쁜 유재석이 가정에서 겪을 만한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내거나, 방송 분량에 대한 불안으로 자꾸만 토크를 시도하는 유재석에게 “꼭 이렇게 셋이 모여서 토크해야 해? 각자 좀 쉬자”라고 말하며 관찰예능로서의 방향을 잡아주기도 한다. 틀이 꽉 짜인 예능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 프로그램에서, 이효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

예전부터 이효리는 Mnet ‘오프 더 레코드, 효리’와 온스타일 ‘골든 12’ 등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때 가장 매력적인 스타였다. 그야말로 톱스타의 위치에 있으면서 자신감을 드러내고, 그러면서도 신비주의를 고수하지 않는 방식으로 꾸준히 사랑받았다. 이효리가 리얼리티쇼에서 어떤 계산도 없이 자신을 전부 드러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따라, 함께하는 사람들에 따라 자신을 어느 정도로 드러내며 어떤 캐릭터로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할지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기획자 혹은 연출자에 가까운 엔터테이너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데다 일반인 출연자까지 있었던 JTBC ‘효리네 민박’에서는 아이유와 윤아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일하는 다음 세대의 여성들과 일에 관한 고민을 진지하게 나누었고, 민박을 방문하는 일반인들에게는 자신의 스타성을 과하게 내세우지 않고 민박의 주인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캠핑클럽’에서도 그는 과거 핑클의 리더로서 나머지 멤버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한 명 한 명의 캐릭터를 부각하는 역할을 도맡는다. 아주 오래전 함께 활동했던 멤버들은 서로 아주 친하다고 하기 어렵고, 핑클로서 네 사람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시청자들도 존재한다. 게다가 ‘캠핑클럽’은 넷이 이곳저곳에서 캠핑을 하는 게 전부인 프로그램이다. 예능으로 ‘좋은 그림’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효리는 핑클 활동 당시에는 어색한 사이였다는 이진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가 하면 먼저 몸개그를 해서 분위기를 풀거나 핑클로, 또 솔로로 활동하며 느꼈던 것들에 관해 털어놓기도 한다.

“이 연이 날면 잘돼서 공연을 하게 되는 거야.” ‘캠핑클럽’ 8화 중 이효리는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서 몇 번이고 연을 날리려다 실패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며 주저앉아 울던 그는 핑클에 대한 미련이 남았음을 고백하고, 그의 고백은 핑클 이후의 삶이 쉽지 않았다는 성유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마침내 함께 안무를 연습하고 있는 네 사람의 모습이 감동적일 수밖에 없는 건, 상당 부분 ‘캠핑클럽’ 안에서 핑클과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내려간 이효리 덕분이기도 하다.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리얼’을 표방하고 다큐멘터리에 가까워지려는 지금, 이효리는 리얼리티쇼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의미 있는 순간들을 발견하고 엮어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보여준다. 시대는 변했고, 이제는 이효리를 일인자라고 부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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